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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보다

제1계 제2조 - 위위구조 : 강한적을 분산시켜 쳐부수다.

제 1 장 승전계(勝戰計)


: 아군이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구비되었을 때 취하는 작전.


1. 만천과해(瞞天過海) :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너다. - 은밀하게 내일을 도모하라.

2. 위위구조(圍魏救趙) : 강한 적을 분산시켜 쳐부수다. - 정면공격보다 우회하라.

3. 차도살인(借刀殺人) : 칼을 빌려 사람을 죽이다. - 직접 나서는 것은 초보자의 방법이다.

4. 이일대로(以逸待勞) : 쉬다가 피로에 지친 적과 싸운다. -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라.

5. 진화타겁(袗火打劫) : 불난 틈을 타서 도적질을 한다. - 기회가 왔을 때는 벌떼처럼 공격하라.

6. 성동격서(聲東擊西) : 동쪽을 향해 소리치고 서쪽을 공격한다. - 상대방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라.



     오늘은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유치원 아이들도 달달 외운다는 36계의 두번째 시간으로 제1계 제2조 위위구조(圍魏救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위구조(圍魏救趙)는 글자 그대로 보면 위나라의 도읍을 포위하는 방법으로 조나라를 구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해석은 약간 어감의 차이가 있습니다. '강한적을 분산시켜 쳐부순다.' 즉 '직접적인 대결보다는 상대를 허를 찌른다.' 의미를 가지는 데요. 여기에는 재미있는 고사가 또 들어있습니다.

귀곡자

<귀곡자>


앞에서 말씀드린 손빈은 잘 아시는 것 처럼 귀곡자(子)의 제자로 방연과 함께 동문수학하면서 병법을 배웠습니다. 방연은 일찍 공명에 깨우침을 얻게되어 위()나라 혜왕()에게 기용되어 부근의 약소 국가들을 정벌하는 공을 세웁니다. 제나라 사람인 손빈은 그 재능이 방연보다 한 수 위였고, 혜왕도 손빈의 명성을 듣고 있었으므로, 동문수학한 방연에게 그를 초빙하게 하여 중요하려합니다.


하지만 방연은 손빈의 재능을 시기하여, 혜왕에게 손빈이 제나라와 밀통한다고 모함하였다. 손빈은 슬개골을 잘리는 형벌을 당하고, 얼굴에는 죄수임을 나타내는 문자를 새기게 됩니다. 방연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손빈은  미친척하고 돼지우리에서 생활하며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수년 동안 위기를 모면한 손빈은 위나라를 방문한 제나라 사신들에게 구출되어 제나라로 몰래 탈출하게 되고 성공하게 됩니다. 귀곡자로부터 손빈의 이름을 듣게된 뒤로 오래동안 손빈을 흠모하던 제나라의 대장 전기()는 위왕()에게 손빈을 천거하게 됩니다.

<손자병법 죽간, 1972년 산동성 출토>




그 후 B.C354년 위나라가 조()나라를 공격하자, 조나라는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위왕은 전기와 손빈을 각각 대장과 군사()로 삼아 군대를 파견하게 되는 되요, 병법에 능했던 손빈은 직접 조나라를 구하는 대신에 조나라를 공격하는 데 병력을 투입하여 방비가 허술해진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공격합니다. 이소식을 듣고 위급해진 방연이 조나라 공격을 중단하고 당읍현 동남쪽 계릉으로 철수하는 길목에 '전도팔문진'이라는 귀곡자의 진법으로 지키고 있다가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여기에서 '위위구조(: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다)'라는 말이 유래 되었습니다.

<계릉전투>


손빈과 방연은 그 후로도 수차례에 걸쳐 원한관계(?)를 풀게됩니다. B.C 341년 위나라는 한()나라를 침공합니다. 제나라 선왕(王)은 한나라의 구원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다시 전기장군과 손빈을 구원군으로 파병하게됩니다.
손빈은 이번에도 한나라를 구하러 가지 않고 위나라를 공격합니다.

병법이 뛰어 났던 방연은 이번에도 손빈이 한나라를 구하러 가지 않고 위나라를 치러 올것을 예측하고, 대군을 이끌고 전기장군과 손빈의 부대가 진군하는 곳으로 진군하게 됩니다.

그런데 손빈은 더이상 전진하지 않고 매일 100리씩 후퇴를 하기만 합니다.
이상하게 여긴 방연이 제나라 군대의 병영을 정탐해 보니 솥걸이(식사자리)가 10만이더니, 다음날은 5만, 다시 다음날은 2만으로 줄었습니다.

IQ만 높고 EQ는 다소 낮았던 방연은 제나라 병사들이 탈영하여 계속 줄어 든 것으로 판단합니다. 다음날 부터 맹추격을 실시하게 되는데요. 

 마릉()이라는 곳에 다다르자 방연이 병사들을 더욱 독려하여 진군합니다. 잠시 뒤에 척후병이 앞에 나무가 쓰러져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방연이 살펴보니 거기에는 "방연이 이 나무 아래서 죽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제서야 손빈의 계략임을 알아차린 방연은 즉시 후퇴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사방에서 제나라 군대가 공격해 들어 왔습니다. 제나라 군대의 솥 숫자가 줄어든 것은 방연이 경계심을 풀고 공격해 오도록 유도한 손빈의 책략이었던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병사들을 마릉에서 잃게 된 방연은 줄기차게 도망가지만 결국 퇴로가 끊기자 자결하였습니다.


<마릉전투>


위의 내용은 [사기]의 〈손자오기열전()〉에 실려 있는 고사로 손빈과 방연의 사이를 두고 재능이 비슷한 사람이 계책을 써서 기량을 겨루거나,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원수가 되어 생사를 다투는 일을 비유하는 말로 손방투지 [孫龐鬪智]라는 고사성어도 사용합니다.

아무튼 위위구조는 상대의 허점을 정확하게 그리고 신속하게 건드리는 계책입니다.

손자병법의 예를 들었는데요. 이번에는 삼국지에서 그 예를 찾아보도록하겠습니다.


한통의 편지로 30만 대군을 돌려세우다!

조조는 서량의 마등을 죽인 후에 주유가 병사한 틈을 타서 동오의 손권을 멸망시킬 계획이었습니다. 이때 형주로 부터 첩자의 보고가 들어오는데요, 바로 유비가 군대를 훈련시키고 병기를 제조하여 서천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이는 제갈공명의 3분지계로 유비로 하여금 대륙 최고의 근원지인 형주를 먹게하고 그 빽그라운드로 서천을 접수하는 계책이었습니다. 

이말을 들은 조조는 역시 재략가임에 틀립없습니다. 쿠게 놀라고 마는데요, 만약 유비가 서천을 점거한다면 유비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커지게 되어 후일을 도모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선것입니다.

하지만 욕심많은 조조는 유비를 공격할 마음도 있었지만, 동오를 멸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놓치기는 더욱 싫었습니다. 골몰히 생각에 잠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만 하자 모사 진군이 계책을 올립니다.

'현재 유비와 손권은 매우 긴밀한 동맹관계(처남 매부)를 맺고 있습니다. 만약 유비가 서천을 공격하여 취하려 한다면, 승상께서는 군대를 파견하시어 강남의 동오를 공격하십시요. 그러면 손권이 유비에게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유비는 서천을 취할생각뿐이므로 손권을 도와줄 마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먼저 동오를 함락시키고 형주를 평정한 뒤에 서서히 서천을 도모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무릎을 친 조조는 그 즉시 30만 대군을 이끌고 동오를 치러가게 됩니다. 역시 진군의 계책대로 당황한 손권은 급히 노숙을 보내 형주의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게 됩니다.

유비로서는 서천을 취하려면 동오를 도와주기에는 서천땅이 너무 아깝고, 그렇다고 않도와주자니 손-유 동맹이 깨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갈공명이 남군으로 부터 돌아와 상황을 짐작하고는 이렇게 간합니다.

<제갈공명상>

"주군! 우리가 동오로 출발할 필요도, 서천을 공격하는 것을 멈출 필요도 없습니다. 다지 한통의 편지를 써서 서량의 마초에게 보내 조조를 공격하게 권하십시요. 조조로 하여금 머리와 꼬리를 함께 볼 수 없도록 만든다면 그스스로가 동오에서 철수 할 것입니다."

유비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이 해소된 듯 기뻐하며 친필편지를 보내 마초에게 비어있는 중원을 치도록 권유하였습니다.

마초는 부친 마등과 동생을 조조에게 잃은 원한이 있어 그 즉시 비어있는 중원을 향해 '서량의 아들'들 20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게됩니다.

원수를 갚기위해 이를갈던 마초는 기세등등하게 장안과 동관을 함락하고 진군하게 됩니다.

이 보고를 받은 조조는 어쩔수 없이 군사를 급히 서북쪽으로 돌릴 수 밖에 없었는데요. 동오를 치려던 계획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갈공명은 조조가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외칩니다.

"이것이 손자의 위위구조다!"

제갈공명의 '한장의 편지!'는 30만 대군의 발걸음을 돌린 정말 무서운 위위구조였던 것입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사관학교에서 전쟁사를 배울때를 생각해 보면 전략과 전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형과 전쟁양상을 고려하면서 전개되기 마련입니다.

한국전쟁 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워낙 친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6월29일 한강방어선을 시찰하게 됩니다. 후일 맥아더는 이미 상륙작전을 감행할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물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통해 승기를 잡은 case가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을 겁니다. 참고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쉽게 생각해내지 못했으니까요.

아무튼 맥아더는 북한군을 전면에서 막고 즉시 반격으로 나서기는 어렵다는 판단을 했고, 당시에는 한국지형에 대한 조사와 보고는 없었기 때문에 인천을 상륙지역으로 선택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있었겠지만 보급로와 후방을 차단하여 일시에 북괴 인민군을 섬멸할 수 있는 작전이 필요했던 것은 자명합니다.

이에 반해 김일성의 생각속에도 상륙작전을 우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낙동강으로 밀려난 전선에서 '최후공세'라고 불리는 8월29일 김일성의 전장 독려 연설문에도 서울과 가까운 인천이 상륙작전의 예측 지점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연합군 측은 맥아더를 제외한 모두가 지리적 위치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하였고, 북괴 또한 특별히 방어망을 강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맥아더는 당시 반대하기 위해 극동군사령부를 방문한 요셉 엘 콜린스 미육군 참모총장을 설득하였을 정도로 강력한 신념과 뚝심으로 밀어 부쳤던것 같습니다. 맥아더는 9월 미 극동군사령부를 기반으로 재창설된 미 10군단을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신임 군단장에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을 임명하여 속전속결을 명령합니다. 이 역시 맥아더의 강력한 자신감에서 발원된 것입니다.

시간은 다가오지만 당시 미10군단은 편성이 일부 미편제였습니다. 즉, 군을 다녀오신분은 아시지만 1, 2, 3, 지원의 3개편제가 아닌 미해병1사단과 미7사단의 2개사단으로 급조된 부대였고 각각의 사단역시 1개연대씩 미편제된 상황에서 작전을 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한국군 해병 1연대와 국군17연대가 미 10군단에 배속되어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작전에 당당하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통상 군에서의 상륙작전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횡대형의 길게 늘어선 해안선을 향해 넓은 광정면을 가지고 일시에 상륙하는 것이 생존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인천은 여러가지의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최악이었는데요. 우선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심해 시간적 제약이 따랐습니다. 다음은 대규모의 병력을 실은 전함들이 종대대형으로 측면을 노출하면서 '줄줄이 비엔나'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화력집중은 좋은 대형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군함의 측면노출은 안전벨트도 없고, 에어백도 없는 정면충돌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USS Mount McKinley호에서 지휘하는 맥아더장군, 전쟁기념관>

여러가지 않좋은 여건속에서도 맥아더가 상륙작전을 감행한 속내는 이렇습니다.

'적들은 이런 불미한 여건을 감안하여 인천에 방어선을 구축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일 전사 분석상 이 일을 놓고 여러가지의 의견이 분분했지만 맥아더의 생각은 최고의 위위구조입니다. 불과 보름뒤에 시도된 원산상륙작전이 있습니다. 대부분 전사를 공부하지 않으신 분들은 역사책에서만 볼 수 있는 전사인데요. 승리하지 않는 전투는 잘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역사가 아쉽지요^^. 북괴군이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볼 수 있는데요. 우리 한반도를 놓고볼 때 해안선이 가장 잘 발달되어 상륙작전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는 곳은 동해안이고 특히 해안선이 긴 원산은 지형상 상륙시 발생할 수 있는 여러가지 변수를 줄여주는 좋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한 미 10군단은 보름뒤에 원산상륙작전을 펼치지만 그뒤로도 보름동안 미10군단은 원산앞바다에 무수히 많이 설치된 수뢰에 의해 상륙자체가 불가했습니다.

결국 육상으로 진군해온 국군 제1군단의 원산수복작전 후에야 겨우 입항을 하게됩니다.

이처럼 북괴역시 정확하게 상륙작전이 가능한 곳은 대규모 화력을 집중시켜 방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맥아더의 정확한 전장 분석은 '세계3대 상륙작전' 중에 하나인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킬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상륙작전은 성공하였지만 서울 수복은 그로부터 13일 이후에나 가능했습니다. 전사상 이런 분석이 가능합니다. 

상륙작전에 대비해 북괴군이 인천에 대량의 수뢰를 매설했을 경우는 인천상륙작전이 실패하지는 않았어도 낙동강 전선의 주력부대 중 일부를 철수 시켜 서울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했을 확률이 상승합니다. 당시의 뒤로 물러나는 상태에서 차로 한시간 거리를 주력도 아닌 부대가 13일 동안 방어했다는 것은 정말 처절한 저항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지금까지 전세계 전사상에도 인천-서울 거리를 13일 동안 공방한 경우는 극히 드문 사례입니다. 

<인천상륙작전도, 전쟁기념관>

아무튼 1950년 9월 14일 밤을 기점으로 총 261척의 미7기동함대는 경기만으로 집결합니다. 역사적인 9월15일 새벽 02시 '맥아더'의 상륙명령과 함께 19척의 공격함대가 종대대형으로 진격을 시작합니다.

4시간 동안의 대대적인 측면 포격과 지원폭격을 마치고 미 해병 1사단 5연대 3대대 병력이 17척의 상륙정과 전차 9대를 선투로 Green Beach(월미도)에 06시 30분에 상륙합니다. 여기서 첫번째 위기가 오는대요. 바로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이입니다. 당시 인천과 월미도는 방파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요. 이 방파제의 교두보를 주력부대가 상륙하기 전까지 400여명의 3대대원들이 다음 물때 까지 고립된 채로 방어해야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시간이 맥아더에게는 가장 조마조마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적지만 교두보를 지키는 병력때문에 화력지원도 불가능하고 그 정도의 시간이면 인근의 적군이 증원될 수 있는 12시간이라는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당시 지휘함은 USS Mount McKinley호 였습니다. 맥아더가 직접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도 그 12시간은 평생회자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맥아더의 선택은 12시간동안 함재기를 이용한 맹폭으로 적군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오후 물때가 되자 미해병5연대 본대인 1대대와 2대대가 Red Beach로 미 해병 1연대는 Blue Beach로 상륙합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16일 새벽 인천은 완전히 탈환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계전사에 보기드문 항구로의 직접상륙작전입니다. 즉 엄중한 경비가 넘쳐나는 항구로의 직접상륙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맥아더의 '발상의 전환'은 위위구조의 쾌거입니다. 상륙작전 초기에 인천항을 장악하게되어 맥아더의 후속부대는 많은 물자와 추가인원을 신속하게 증원하여 3일만에 한강이남으로 진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잘 알고 계신 것처럼 낙동강과의 거리는 300Km가 넘는 거리였기에 대형의 항구를 장악하지 못했다면 지속적인 전투를 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런 이유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은 많은 반대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맥아더는 낙동강 전선의 배후를 친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물류거점을 확보하고 단 한번의 공격으로 적의 허를 정확히 찔렀던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맥아더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구조가 있었다면 역사상 빛나는 인천상륙작전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핵심으로 접근하자

위위구조의 결론은 결국 적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만드는 맹점을 먼저 잡아내는 것입니다. 맹점이나 헛점을 정확히 분석하고 단 한방으로 그로기를 만들어 낼때 위위구조는 말대로 되는 것입니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것입니다. 손무나 손빈, 제갈공명과 사마의 처럼 희대의 전략가들은 보고있는 시야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적이 가지고 있지만 항상 숨기고 보호하려고 하는 핵심이야 말로 내가 쥐락펴락 할 수 있다면 바로 전장의 주도권을 잡는 것이고, 이를 뒤집는 한방이야 말로 주도권을 뒤집어 승리의 여세를 휘어잡는 위위구조인 것입니다.

※ 중국 아이들도 외운다는 36계를 우리도 한번 외워보고자 최대한 쉽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세상의 핵심으로 발돋움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