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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보다

[돌아보기] 01. 한국인 최초의 비행기 조종사 안창남

※ 본 내용은 네이버, 위키백과(한, 영), 독립기념관, 우리독립역사, 한국사사전3, 태극기-송명호, 일본항공사 등의 자료를 통해 얻은 자료를 편집하였습니다. 다소의 오류가 있을 수 있으므로 참고 자료로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 프랜디

안창남(1900 ~ 1930)

최초의 조종사들은 당시의 연령대와 무관하지 않겠지만 역사의 한획을 긋고 우리의 옆을 오랫동안 지키지 못하신 것 같다.
안창남(이하 안창남) 선생님은 30살이라는 짧다면 짧은 생애를 사셧고, 최초의 민간 여류 조종사로 불리우시는 박경원(1901~1933)(이하 박경원) 선생님 역시 32이라는 짧은 나이에 생애를 마감하셨다. 박경원선생님에 1년앞서 조종사가 되신 권기옥(1901~1988, 독립운동가, 최초의 여성출판인, 최초의 여군조종사)선생님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윈난육군항공학교를 통해 군인으로 임관하였기에 안창남, 박경원과는 다소 성향은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안창남은 일제강점기이던 1901년 3월 19일 한성부(서울) 평동에서 출생하여 4살때 어머니를 잃고 계모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서울 미동소학교(서대문구 미근동, 무악재 근처)를 나오고 3.1운동 직후 생시 의관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휘문의숙(1906년 하정 민영휘-1852~1935, 갑신정변진압-가 설립, 휘문중고등학교의 전신)을 다니던 중 15세때 아버지마저 잃게 된다.
시대적 상황으로 시묘살이를 할 수 없던 시절이라 다니던 휘문의숙을 중퇴하고 3년동안 매일 부친의 묘소를 찾아 시묘살이 아닌 시묘살이를 하는 효자였다.

청운의 꿈을 꾸다.

1916년 용산연병장에서 벌어진 아트스미스(Art Smith, 포트웨인,인디애나주)의 두번에 걸친 아시아 여정(1916년, 1917년) 중 펼쳐진 곡예비행을 보고 우리나라의 후진성을 개탄하며 영감을 얻어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한해협을 건넌다.

 ☞  미동소학교(서대문구 미근동 36번지), 미동초등학교의 전신,
1896년5월1일개교, 1906년9월 한성보통학교개명,
1908년4월 미동보통학교로 개명,
1941년4월 한성미동공립보통학교,
1946년1월 미동국민학교로 개명 - 방정환, 안창남, 엄앵란, 사미자, 김혜수 등




 ☞[당시 아트스미스의 공중곡예 시범은 우리나라 비행역사에 한획을 그은 것은 분명하다. 이 여행을 통해서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 조종사인 안창남과 권기옥이 조종사가 되기로 결심한 동기를 주었다고 한다. 

- 위키백과 Art Smith 검색]
     <스미스의 생전모습>   
                                                                    <당시 아트스미스가 탔던 커티스 쌍엽기>



안창남은 당시 고조되는 독립운동의 열기와 민족의 배우지 못한 과학분야의 신학문을 통한 계몽운동의 기로에 놓인다.
그는 이를 위해 일본어를 열심히 배우기 시작한다. 이때 그의 일가친척들은 그의 도일 행을 눈치채고 서둘러서 구파발인근에 살던 처자를 데려와 강제 혼인을 시키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별 관심사가 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친척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돈 삼천원을 가지고 단신으로 도일하게 된다.


신기술을 배우다.

당시 일본인의 철공소 공원으로 일하고 있던 아버지의 친구 김씨가 거주하던 오사카가 그가 처음 밟은 일본 땅이었다.
김씨의 소개로 오사카 유지였던 철공소사장 야마모토를 통해 오사카 자동차학교[]에서 2개월간 운전과 자동차원리를 배운 뒤 도쿄로 이동하게 된다.

도쿄로 온 안창남은 아카바네 비행기제작소[]에서 비행기 제조법을 배웠으며 1920년 초 오쿠리 비행학교[]에서 조종술을 배우고 졸업 후 모교의 교관이 되었다.

    
             <당시 아카바네 비행기제작소에서 제작된 비행기>                   <당시 일본의 비행학교 조종사 양성 사진-군관학교와 민간학교가 병행되었다.>


비행학교에서 일어서다.

1920년 당시 일본의 상황은 식민지 정치의 동화와 만주침략이라는 단계를 밟고 있는 시기로서 식민지 출신역시 다소간의 이질감은 있었지만 그 배경과 신분을 두고 영화 [청연]에서 처럼 어느정도 일본인으로 인정해주는 추세 였던 단계였다.

당시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길은 안창남이 밟은 코스가 일반적인 코스로서 뒤에 박경원, 이정희로 이어지는 여류 조종사의 절차 역시 이와 다르지 않았다.
오쿠리 비행학교의 비행과정은 6개월 코스였지만 안창남이 졸업한 1920년에는 조종사 면허시험이 없었으며, 이듬해인 1921년 4월 25일 일본 최초의 조종면허 발급 규정이 생긴다.
안창남은 비행학교를 세우고 일본보다 앞서는 비행기와 비행술을 갖고 싶어했다. [개벽] 1920년 12월호에 다음과 같이 자신의 비행술을 선보이고 싶다라고 밝혔다.


☞ 잡지 [개벽]에 실린 그의 심경
"그냥 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를 틀어 독립문 위까지 떠가서 한바퀴 휘휘 돌았습니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머리 위에 뜬 것이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 있는 형제의 몇사람이나 거기까지 찾아간 내 뜻과 몸을 보아 주었는지...
붉은 담에 에워 싸인 빛 누런 마당에 햋빛만 혼자 비추고 있는 것이 어떻게 형용할 수 없이 한없이 쓸쓸해 보였습니다."




이때 안창남은 1921년 4월 부터 오쿠리비행학교의 교수로서 후진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1920년 8월 이 비행학교에 입학한 안창남은 입학 두 달 만인 10월 15일 오쿠리 교장이 '아사히버선' 광고지 20만매를 도쿄 시내에 뿌릴때 일본인 연구생을 제치고 그의 조수로 비행기에 동승하기도 하였다.
남들은 1~2년이 걸리는 졸업과정을 불과 3개월 만에 마친 그는 학교측의 간곡한 권유로 비행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교수가 된 지 한달만인 1921년 5월 일본최초로 치뤄진 비행사 자격시험에 참가하여 17명의 응시자 중 유일한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놀라운 것은 17명 중 2명의 합격자가 나왔으며, 안창남은 그 중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결론적으로 일본과 우리나라를 통틀어 라이센스를 가진 최초의 조종사 2인 중 1인 이었으며,  최고의 실력자 였다는 것이다.
이 역시 역사의 증거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참고로 일본최초의 비행시험 과목은
1. 원거리비행 : 도쿄 ~ 마쓰에 구간
2. 2,000 m 상공에서 1시간 Holding Flight
3. 500 m 상공에서 Engine stop 후 Gliding Landing 이었다.



안창남은 성격 또한 대담하여 3등 비행사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곡예비행을 하다가, 당시 경시청과 항공국에 의해 몇 차례 경고를 받기도 했다.

1922년 11월 6일 안창남은 창고 속에 버려두었던 폐기와 다름없는 비행기를 몰고 나와 일본제국비행협회가 주최한 토쿄-오사카 간을 왕복하는 우편 비행대회에 참가하여 우수상을 차지했다.
또 호시 추모비행을 하기 이십 여일 전에는 일본 전국민간비행경기대회에서 불완전한 비행기를 타고 나가 2등상을 탔다.
요컨대 민간 비행사로서 그의 천재성과 재능은 일본에서도 주목받고 있었다. 그것도 언제나 고장의 위험을 안고 있는 불완전한 비행기로 이루어진 성과였다.
 
☞ 호시 토오루는 일찍이 영국에 유학하고 와 일본 최초의 변호사가 된 인물이다. 그 후 자유당에 입당해 대의사(代議士)가 되었으며.
1892년 일본 중의원(衆議院) 2대 의장이 되었다가 뇌물수수 의혹으로 중의원에서 제명당하였다. 토오루는 대한제국의 법률고문 등을
 맡아 우리와도 달갑잖은 인연도 있다. 나중에는 정적이었던 이토히로부미가 주도한 내각과 입헌정우회에도 참가했고, 도쿄시
의회의장 재직 중인 1901년 일본의 검도가에게 암살당했다.



그 후 1922년 안창남은 도쿄와 오오사카 사이의 우편비행 대회에 참가하여 최우수 상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동아일보가 주최하고, 박영효가 위원장이 되어 [안창남 고국방문비행 후원회]가 결성되며, 성금을 모아 안창남을 초청하기에 이른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하에 태극기를 사용할 수 없던 안창남은 1922년 12월 10일(일요일) 한국지도를 그려 넣은 쌍엽기 금강호를 요꼬하마 항으로 부터 인천항으로 수송하여 조립하여 방문 비행을 하였다.

이소식은 당시 식민지배하의 우리나라에 널리 퍼지게 되며, 자전거 점원에서 싸이클선수로 유명세를 날리던 엄복동과 함께 민요 [청춘가]에 개사된 가사를 붙인  '떳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의 자전거~' 라는 구전 가요를 만들기도 했다.
 
☞ 당시 [안창남 비행가]로 불리던 이 노래는 일본순경의 등뒤에서 동내 아이들이 일부러 크게 불러대며 민족의 자긍심을 노래하던
 노래로 유명하다.


당시 안창남의 모국비행을 보기위해 한겨울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여의도 백사장에는 약 5만여명의 인파가 몰렸으며, 소학교와 중고등학교의 단체관람 학생이 1만명에 다달았다. 또한 하루 4회의 임시 열차를 운행하기도 했다.
당시 안창남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군중들을 위하여 13분과 5분의 2회 비행을 실시하였으며, 각 신문들은 연일 이를 보도하였다.
이는 1913년 8월 29일 일본해군의 기술장교 나라하라가 '국치일'에 맞춰 용산 일본군사령부 연병장에서 시범비행을 보이며, 일본의 기계문명을 과시하고 모욕과 협박을 가하였던 공개적인 시위행사로 부터 10년만의 일이기도 했다.


  <시범비행을 마치고 금강호 조종석에서 촬영한 안창남>                               <당시 금강호와 창덕궁을 상공을 비행중인 금강호>

 
☞ 당시 신문기사
"아! 이십세의 조선청년으로 일본에서 교편을 잡기도 처음이요, 넓고 넓은 동경 시가를 내려다 보면 높이 떠서 동경시민에게 조선인의
 재주가 이렇다는 것을 보여준 이도 안창남이 처음이다."
"천재 파일럿트"
"공중의 의용자"

☞ 당시 [금강호]에서 3회에 걸쳐 뿌린 1만여장의 오색전단 내용
[기차와 기선이 발명됨으로써 세계인류의 생활이 얼마나 발달되었습니까? 비행기의 발명, 항공기의 발달은 이제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케하고 있습니다. 이 문명의 진전, 이기의 발달에 선각하는 자는 흥하고 낙오하는 자는 망합니다.]

☞ 여의도 비행 후 안창남의 인터뷰 기사
"조선에 돌아와 비행학교를 세우고 조선 청년들에게 비행술을 가르치는 것이 장래의 포부 올시다."



그러나 국내에서 비행학교를 내어 후진을 양성하고 싶다는 안창남의 소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모금활동이 부진하여 비행기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인을 위한 조선인에 의한 비행기 한 대 없는 고국’을 뒤로하고, 안창남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다.



성황리에 모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간 안창남은 일본에서 비행학교에서 일하는 한편, 비행대회에 출전하기도 하다가 호시를 추모하는 전단 뿌리기 일을 맡았다. 그러나 이날의 비행은 순조롭지 않았다.
1923년 6월 22일은 일본의 정치가 호시 토오루(星亨)가 비명횡사한 지 23주기가 되는 날로 평소 그를 경모하던 일본의 정객들과 유지들이 모여 이날 오전 10시 그의 묘에 참배하고 이케카미혼몬지에서 대대적으로 추모법회를 열었다. 이와 동시에 호시의 '위업'을 알리고자 전단 십만장을 인쇄 제작하여 도쿄상공에서 뿌리기로 한것이다. 이들은 동경 스사키 해변에 있던 민간항공회사인 오코리 비행학교에 이작업을 의뢰하게 되고, 오쿠리 비행학교의 '신진비행사' 안창남이 이일을 맡은 덕이다.

안창남은 전단을 실은 비행기를 몰고 이케카미 상공을 날았다. 그러나 갑자기 기체에 고장이 나서 누가니하치만(根方八幡)의 진흙밭 속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바퀴와 프로펠러 등 기체는 온통 진흙창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무사했다. 뒤집어진 비행기에서 나온 안창남을 사진기자가 촬영을 하자 그는 의연하게 자세를 취했다.


                                        <추락 당시 안창남의 사진>

뒤집어져 배를 하늘로 내어놓은 비행기와 달리 그는 마치 비행대회에서 우승한 것처럼 당당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눈매는 더욱 빛나고 입가에는 미소마저 띠고 있다. 그는 아마도 이렇게 외친 것은 아닐까.

“비행기는 추락했어도 나는 추락하지 않았다!”

 이 사생을 넘나든 비행 두어 달 후인 9월 안창남은 고국에 섬뜩한 소식을 다시 한 번 전한다. 관동대지진으로 일어난 조선인 대학살 사건으로 안창남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국내 신문을 통하여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름 뒤 무사하다는 소식과 함께 그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음이 판명되어 많은 사람들이 안도하기도 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 이후 다카스수용소에 억류된 3196명의 조선인 학살사건 등 조선인에 대한 탑압에 대한 참상을 목격하고 다락방에서 숨어지내다가 민족의식이 강했던 그는 조국 독립을 위해 귀국을 감행한다.


독립운동을 하다.

1924년 10월 고국에 귀국했다가 이듬해 1월경 일본 경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동지인 김동철과 함께 만주를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안창남은 제일 먼저 상해임시정부 등과 접촉하여 비행사의 양성을 통해 항공독립군을 구성하겠다는 자신의 구상을 밝혔으나 사무실조차 간신히 꾸려나가던 임시정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다시 북경으로 옮겨 당시 [독립협회]의 월남 이상재(1850~1927)선생의 도움으로 [신한청년당]을 이끌던 몽양 여운형(1886~1947)선생을 만나게 된다.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참여 한다. 

몽양선생을 통해 망명하여 혁명군 중장으로 중국군벌 옌시산(염석산 閻山 1883~1960 일본육사 출신 장군, 산시먼로주의) 장군 휘하의 타이위안[] 비행학교 교장이 되어 비행사를 양성하게 된다. 지금도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의 항공역사의 최초의 교관으로서 명성이 대단하여 사후에 [전선장군] 호칭이 추서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국민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망명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임정은 도쿄 폭격이라는 원대한 꿈을 키우기 위해 조종사의 양성과 확보에 중점을 두었다. 일환으로 안창남을 위시하여 [대한독립공명단]이라는 비밀 항일 조직을 만들게 되고, 안창남은 항일 비행학교 건설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비행학교 건설을 위해 다음과 같이 주창하엿다.
"일본을 이기는 길은 비행술을 하루빨리 익히는 일이요, 다음으로는 비행기 제작소를 많이 만드는 일이다. 이일은 우리가 하루바삐 서둘러야 할 중대한 과제 입니다."
하지만 공명단을 기초로 항공독립군을 이루겠다는 안창남의 꿈은 커다란 시련을 겪게된다. 독립투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공명단 일원이 국내로 잠입하여 총독부의 우편자동차를 습격하는 거사를 벌이기로 하지만 모두 일경에 체포되고 만 것이다.

<왼쪽 : 일본은행 현금수송차량 탈취사건과 검거장면 - 조선일보 1929년 4월 21일 오른쪽 : 대한 공명단 사건 재판기사 - 조선일보 1929년 12월 13일>

그와 더불어 아직 찾지는 못하였지만 1930년4월 2일 그 또한 30이라는 짧고 아까운 인생을 뜻하지 않은 비행 중 추락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자유를 노래하다.

안창남은 당시 일본인들이나 몰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던 비행기를 조선인들도 몰 수 있다고 강변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것을 입증했을 뿐 아니라 국내에 비행학교를 만들어 후진들을 키우고자 했다. 나아가 중국 망명지에서 비행독립군을 양성해 조선해방의 선봉이 되고자 했다.
그것은 일시적인 흥분도 아닌 오랜 그의 구상이자 간절한 염원이기도 했다. 1922년 12월 그는 식민지가 된 고국의 하늘을 날면서 서울과 인천을 내려다보면서 느꼈던 자신의 격정을 『개벽』지에 글로 발표했다.

경성의 하늘! 경성의 하늘!
내가 어떻게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르는 경성의 하늘! 이 하늘에 내 몸을 날릴 때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 
경성이 아무리 작은 시가라 합시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도시라 합시다. 그러나 내 고국의 서울이 아닙니까. 우리의 도시가 아닙니까.
장차 크게 넓게 할 수 있는 우리의 도시, 또 그리할 사람이 움직이고 자라고 있는 이 경성 그 하늘에 비행기가 나르기는 결코 1,2차가 아니었을 것이나 그 비행은 우리에게 대한 어떤 의미로의 모욕, 아니면 어떤 자는 일종 위협의 의미까지를 띤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 잘하나 못하나 우리끼리가 기뻐하고 우리끼리가 반가워하는 중에 우리끼리의 한 몸으로 내가 날을 수 있게 된 것을 나는 더할 수 없이 유쾌히 생각하였습니다.
(안창남, 「空中에서 본 京城과 仁川」 『개벽』 1923년 1월호)

<출처 : 한국역사연구회( http://www.koreanhistory.org/home.php >

제국주의자들의 “모욕의 비행” “위협의 비행”으로 더렵혀진 조선의 하늘을 “잘하나 못하나 우리끼리가 기뻐하고 반가워하는 중에 우리끼리의 한 몸으로” 날아보려던 안창남이야말로 진정 자유로 상징되는 하늘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었다.

후일까지 직계후손이 없고 독립운동의 구체적 공적을 증명할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다 민간차원의 노력이 빛을 보게 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안창남의 중국과 임정하에서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하여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 하였다.

<건국훈장 중에서 4등급의 훈장이다.>

2010년 4월 2일 청주 중앙공원에서 (사)안창남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순국 80주년 기념식 행사를 가졌다.




 ☞ [대한민국공명단]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6권 (독립기념관 발간)

1928년 10월 중국 산서성
山西省 태원太原에서 신덕영申德永·최양옥崔養玉·안창남安昌男 등이 “파괴·암살로써 민족을 해방시킨다”

단장이 누구였는지 불명(비밀결사)인 채 부단장인 신덕영이 실질적 지휘자였던 공명단은 각계의 후원으로 군자금 150만원 정도를 마련하여 

중국의 남경·섬서성陝西省·포두包頭 세 곳에 무관학교를 세우고 청년장교를 교육시켜 5개 사단 7만5천 명 규모의 병력을 양성한 후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할 것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실행부서로 재정부· 정치부·군사부를 두었다.

이 원대한 구상의 현실화를 위한 자금조달 방안을 모색하던 공명단 간부진은 경춘가도京春街道에서 우편차량을 탈취하여 30만원 정도를

획득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재정부원이던 최양옥과 김정련이 모연대원募捐隊員이 되어, 안창남이 제공한 권총과 탄환을 휴대하고 1929년

 3월에 국내로 들어왔다. 입국 길에 두 사람은 신의주부청의 자동차운전수 이선구李善九를 포섭하여, 같이 살고 같이 죽을 벗으로 결의하고

 함께 서울로 잠입했다.

드디어 3인은 실행계획과 거사 후 탈출계획을 세우고 1929년 4월 18일 경기도 양주楊州의 마석재磨石峙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춘천발 서울행

 우편차량을 정지시켜 탈취하였다. 그러나 우편행낭에는 기대했던 현금이 전혀 없었다. 크게 실망한 그들은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오성五星·

선일鮮一 두 자동차 회사의 차량도 정지시켜 엔진을 부숴버린 후 도피하였다.

이윽고 일경의 대대적인 수색작전과 추적이 시작되었고, 결국 거사 후 이틀 만에 김정련은 양주 백봉산栢峰山에서, 최양옥과 이선구는 서울

 시내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동년 12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최양옥 10년, 김정련 8년, 이선구 5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었다.104)



인터넷과 소장하고 있는 내용의 대부분을 발췌해서 수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독립군 조종사양성학교에 대한 부분은 후에 다시 다른 글로 내용을 정리하겠지만 안창남이야 말로 진정한 자주 독립을 위한 비행을 위해 노력한 우리나라 최초의 조종사라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