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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보다

[돌아보기] 02. 내가 살았다는 자취를 남기고 싶을 뿐이다. - 박경원

2005년 잠시 영화 [청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왔던 박경원..



인터넷에 돌고있는 여러 자료들과 수권의 책속에서 마치 안창남 처럼 짧고 굵게 스쳐지나간 그녀의 일생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여러가지 사실에 대하여 다시한번 고민하게 되었다.
그 와중에 이 글이 2005년에 그랬던 것 처럼 그녀의 사후 77년이 지난 지금에도 지극히 민감한 부분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글을 전문으로 쓰는 작가도 아닌 내가 이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는 것만 보아도 자칫 잘못 해석하게 되면 이상한 쪽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을 저와 같은 분야이거나 눈치 빠르신 독자님들은 감을 잡으리라 본다.

글을 써 놓고도 1주일 동안 계속 다시 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보고 케케묵은 신문스크랩도 다시 보았다. 그러면서 나만의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알 권리와 이를 알릴 권리에 자위하면서 이글을 포스팅하기로 했다.다만 이 글을 읽으면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독자님들의 판단에 맡기고 싶었다.

그냥 스쳐가는 글 속에서 작은 지식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적 진실을 개개인들이 하나씩만 밝혀준다면 후일 다음과 같은 논란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선 크게 문제시 되는 부분은 그녀의 친일 논란이다. 그녀가 친일이라고 하는 분들은 모두 000에 의해 친일 논란이 제기되었다고 하며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친일 논란을 처음으로 제기한 분은 모 대학교의 교수님이신데 얼마되지 않는 박경원의 일대기를 쓴 자신의 글을 통해 이를 알렸고, 시간이 흐른 뒤에 [청연](2005, 고 장진영 주연)이라는 영화가 개봉하기 직전에 모 신문기자를 통해 다시 언급되며, 일부 진보매체를 통해 제국주의의 치어리더라는 폄하를 받으며 영화마저 흥행을 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그녀가 친일이 아니라고 하시는 분은 그녀의 행적을 10여 년 동안 조사한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주둔하던 한 일본장교의 딸이 연구하여 발표한 책을 중심으로 그 논리를 펼친다. 그녀가 [친일인명부사전]에 등재된 것도 아니다. 물론 다음에 나올 [친일인명부사전]에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정확히 친일에 대한 정의를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해방과 독립 60주년을 넘긴 이 시점에도 우리의 친일 논란은 여지없이 계속된다. 물론 나 역시 당연히 해야 하며, 반드시 청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1인 이다.
친일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민주주의 민족전선(1946 3 1): 일본제국주의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의 총칭.
2.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과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에 의식적으로 협력한 자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발적이든 피동적이든 우리민족 또는 민족성원에게 실체적, 물질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인 상당한 피해를 끼친 행위자.

현재 위와 같은 정의 속에 꾸준히 발본색원하고 있지만, 이는 단지 행적과 이름만 공개할 뿐 어떠한 사법적 지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몇년 전 백범선생님의 묘소에 <친일인명사전>을 올리고 대한민국만세를 부르던 TV화면이 떠오른다. 하지만 이게 무슨 소용인가.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다 바친 '임종국'씨도 부친의 과거 행적을 통해 아버님도 친일파였다.’고 고백한 적도 있다.

'임종국'씨의 용기있는 선택을 나는 나름데로 달리 생각한다. 이 중요한 일조차도 우리는 우리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존재 들이라고...

여차하고, 다분히 친일적인 성향이 있다고도 그렇다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부분이 그녀의 짧은 인생 속에 여러 장면에 걸쳐 나타난다. 하지만 이 포스트에서는 그런 부분은 되도록 사실 그대로 대부분의 기사를 스크랩하여 기록했다. 너무도 짧은 생애를 살다 간 탓에 남은 기록들이 많치안고 여자로서는 시대의 변화를 끌어내기 힘든 시기였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빨리 우리 곁을 떠난 그녀의 이름에 친일이라는 굴레는 아직은 해결되지 않은 우리의 숙제 일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시 되는 문제는 최초라는 수식어에 대한 부분이다. 일각에서는 그녀가 최초가 아니라고 말하며, 또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거론한다. 심지어 영화를 찍은 감독과 작가마저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고증없는 영화를 만들어 각색하였다.
우리나라 항공사를 다루기 위해서는 일본항공사를 들추어 보지 않을 수 없고, 중국의 그것을 뒤져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은 항공기를 만들어 수출까지 하게 된 나라지만 당시는 아시아의 약소국이며, 오랜 쇄국으로 인한 개방과 개혁의 부재, 군주제의 지엄함 속에서도 고관대작들의 사리사욕을 위한 매국의 행위 속에서 당연히 선진 문물에 대한 시각적 견해와 차이는 주변 강대국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최초라는 수식어에 대하여 알아보자.

최초(最初)라는 것은 맨 처음이라는 의미이다. 말 그대로 맨 처음 한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수식어이다. 희한하게도 초록색 검색엔진에서 최초를 검색하면 영어사전의 예문이 그녀는 최초의 여성 비행사다.’라고 나오는 것은 내가 검색할 줄 알았다는 것인지..^^


아무튼 최초로 비행기를 만들고 탄 사람은 라이트 형제로 알고 있지만 그 위대한 형제보다도 이미 300년 전에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정평구 (1552 ~ 1593, 한성)가 만든 비차가 있었는데 이를 아는 사람은 알지만 그것이 세계 '최초'라고는 하지 않는다. 당연히 만들었으면 그것을 타고 날았을 것이고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최초'의 조종사는 비차를 만들고 탄 정평구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안창남으로 알고 있었고, 얼마전 노백린(1875~1926)장군이 독립운동을 위해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를 양성했다는 기록들이 나온 뒤로 당시 교육받은 교육생들이 최초라고 하는 견해도 있다. 물론 모두 포스팅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최초라는 논란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미국에서 최초의 조종사는 누구입니까?’ 라고 물으면 라이트 형제를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어떤 분야에서 최초인지를 다시 되물어 올 뿐이다. 최초는 다양한 것이다. 최초의 조종사는 아니지만 최초로 완벽하게 대서양을 횡단한 '린드버그'를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최초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수 있다는 사고는 아마 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인 최초의 여자 파일럿을 이야기하면 두 인물이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박경원만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박경원씨를 잘 알기위해 노력하면서 권기옥씨를 알게된 케이스이다. 권기옥씨는 1924년 4월 임정의 추천으로 중국 운남육군항공학교(雲南陸軍航空學敎)에 제1기생으로 입학하여 1년뒤인 1925년 3월 졸업하고 여자 장교가 된 권기옥(權基玉)이다. 박경원 보다는 1년9개월이 빨리 조종사가 된 것이다.  박경원을 민간인으로 한국 최초의 파일러트로 내세운다면 권기옥은 독립투사로서 중국군인 신분의 파일럿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권기옥은 한국인 최초의 여자 비행사라기 보다는 오히려 한국인 최초의 여군조종사로 기록하는 것이 더 빛나리라는 견해가 많다.

안창남이 최초의 조종사 라고 인정 받는 것은 일본 최초의 단 두명 뿐인 조종면장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안창남이 면장을 따던 당시 그는 민간인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의 망명을 택하였고, 권기옥씨 역시 그길을 택하여 10여년을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였다.
생각해보자 망명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자국의 국민이 아니면 그나라의 군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용병과 망명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도 잘 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박경원은 면장을 획득할 당시 민간인이었다. 그녀에게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역사의 기록임을 인지하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도 나는 면장이 없다. 하지만 시험의 면제대상이 되는 1500시간을 넘긴 조종사이다. 남들이 나에게 물으면 나는 조종사였다.”고 이야기 한다. 군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조종을 배웠고 그 때문에 시간은 있지만 취업을 목표로 한적이 없기에 나는 반 쪽짜리 조종사인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너는 조종사가 아니야라고 하지 않는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 들이 잘 알 것이다.

이 최초라는 수식어와 관련해 국방부 여군발전단(<국방여군> 창간호2003년6월)의 글을 인용해본다.

 





"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비행사 박경원과 중국 국민군 제1비행대 소속의 권기옥에 이어 세번째로 비행사 자격증을 소지한 이정희가 1949 1 10일 입대와 동시에 중위로 임관해 공군 최초의 여군이 되었다." - <국방여군> 창간호

우리나라최초의 여성비행사는 박경원
중국 국민군 제1비행대 소속 권기옥
우리나라 공군최초의 여자조종사 이정희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두가 최초인 것이~

[위와 같은 자료도 있지만 도무지 최초가 뭐가 그렇게 중요 한가? 부끄러운 것은 최초 논란이 권기옥과 박경원이 아닌 '지금 우리'의 다툼이라는 점이다. 만약 권기옥과 박경원이 함께 해방을 맞았다면 과연 최초를 다투었을까? 그렇게 상상하고 싶지 않다.] – naver paper castle님의 블로그에서 인용.

다행히 우리나라사람 특유의 도전정신과 미래 지향적 선구자들의 도움으로 이 나라의 항공역사는 다른 나라 들에 비해 그리 뒤지지 않다는 것을 이 [돌아보기]시리즈를 만드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으며, 이는 정말 커다란 고마움과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내 반드시 일주비행을 통해 그 역사의 현장을 다시 한번 돌아보기하고 싶을 뿐이다.


그녀는 이런 미래를 예상하고 이런 논란의 오류에 빠진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살았다는 자취를 남기고 싶을 뿐이다." - 박경원

 

하나 더 추가 하자면 박경원의 나이이다. 이는 정확한 고증을 통하여 현재 대부분의 자료에 나와있는 1901년과 1897년 중에서 수정이 이루어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사자료 중 그녀의 종씨 집안에서 작성한 자료와 출생지인 대구시에서 만들어진 자료는 그녀가 1897년에 출생했다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지만 추후 소개드릴 이정희씨의 수기와 본인의 일기를 통해 1901년 생으로 이 글을 정리 하였다.


박경원(朴敬元, 1901 ~1933 8 7)

  

그녀는 1901년 대구부 덕산정(德山町) 63번지(현재의 삼성금융프라자 입구 왼편)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덕산로이다. 독실한 그리스도 신자인데다가 다행히 가정형편도 넉넉한 집안에 6남매 중 막내딸(5)로 태어났으며, 언니 '섭섭이'에 이어 다섯째도 딸이라서 원통하다는 뜻으로 어릴 적 이름이 '박원통' 이었다고 한다.


여장부이며 신여성인 박경원

박경원은 어려서부터 얼굴에 주근깨가 많아 여자로서의 매력은 별로 없었으며, 손등이 솥뚜껑처럼 크고 힘이 어찌나 좋았든지 이웃 사람들은 박경원을 가리켜 장래 여장부 감이 될 거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박경원이 사내로 태어났으면 좋았을걸하고 몹시 아쉬워하기도 했었다.

그녀는 남산동의 복명초등학교(현재 대구 동부교육청)을 지나 1912년 대구의 부잣집 딸들만 다닐 수 있다는 미국 장로회 계 명신여학교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했다. 이어 신명보통학교 고등과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중퇴한다. 당시 보통 여자가 이만큼 공부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대구에 거주하는 일본인 핵심인물 중에 일언거사’(무슨일이든 참견한다는 의미)라고 불리는 미와(三輪如鐵)’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1903년 대구에 와서 제사(실을 만드는 기술)를 지도하였던 자이다. 그 미와의 후원으로
1917913일 일본 요코하마로 가게 된다.

일차의 도일 기간 중 그녀는 요코하마(橫浜) 미나미요시다죠(南吉田町)에 있는 가사하라(笠原) 공예강습소에 입학하게 된다. 그곳은 견직, 마직물 등을 짜는 기술을 가르치는 직공양성소였으며, 이곳에서 2년 반을 지낸다.

그녀는 요꼬하마 기예학교에 유학하며, 외국의 신학문을 배우기도 하였고 1919년부터는 [재일 대한 요코하마 교회]에 나가 크리스천이 된다.

1920 2월 그녀는 일시 귀국한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2차 유학당시 신문기사로 유추하건데 아마도 부모의 설득에 의한 혼인관련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당시 현모양처의 길과 신여성인들의 기본 코스를 밟듯이 그녀는
그 해
10대구의 자혜(慈惠)의원 조산부 간호부과에 입학한다.
이때 귀국에 대하여 두가지의 이야기가 전한다. 그녀가 자혜의원 간호과를 마친 이유는 간호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하는 설과 일본에서 이미 접한 조종사들의 활약을 접하고 비행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비용을 벌기 위하여 라고 한다.

다만 당시의 상황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일본에서 보다는 한국에서 돈을 버는 것이 더 나았다고 한다.
겉으로는 부모들의 혼사문제에 대해 학업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설득의 기회를 만들면서 내심 조종사의 꿈을 키우지 않았는지 하는 생각이 든다.




안창남의 금강호를 보다.

그러던 중1922 12 10일 당시 1등 비행사 안창남이 동아일보 주최로 고국 방문 비행을 한다.([돌아보기]다른 포스트 참조.)
여의도 상공을 나는 그의 자랑스런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 왔다. 이 장면을 구경하게 된 일이 그녀를 파일럿의 길을 걷게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바로 저거야. 이제부터 내 꿈은 간호사가 아니라 파일럿이야. 여자라고 파일럿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

그녀는 결국 파일럿이 되기 위해서 1924 12월 다시 한번 일본으로 떠난다.

그녀는 같은 조선인인 안창남이 교관으로 있는 오구리 비행학교로 가고 싶어했으나 오구리 비행학교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불타고 없어졌다. 안창남 역시 가고시마에서 혼다(本田稻作)가 경영하는 수륙(水陸)비행장으로 옮긴 뒤 소식은 끊겨 있었다. 당시 안창남은 그녀가 도일하기 직전인 1924 10월 독립운동을 위해 귀국하였지만 그녀는 모르는 내용이었다.([돌아보기]01.참조)


어쩔 수 없이 그녀는 19251월 도쿄
가마다(蒲田) 자동차학교를 찾아가 입학수속을 마쳤다. 그 당시에는 비행사가 되려면 먼저 자동차 운전 시험에 합격을 해야 됐기 때문이었다. 마침 가마다 자동차학교는 일본 비행학교까지 운영하고 있어서 파일럿이 되려는 그녀에게는 아주 적합한 학교였다 그녀는 이곳에서는 먼저 지상 교육을 받았다. 아직 자격과 경제력이 허락 지 않아 조종과에는 들어 갈 수 없었다. 그 지상 교육이 자동차 운전이었다. 이것이 비행기를 이해하는데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미 안창남 뿐만 아니라 많은 비행사들이 그 코스를 밟았다. 그러나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비행기를 타려고 하느냐며 두 번째 일본 유학을 완강히 만류했던 부모로부터 학비 조달이 끊겨버린 그녀는 넉넉하지 않은 고생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오로지 파일럿이 꼭 되고야 말겠다는 희망으로 버텨낸 것 같다.
가마다 자동차학교를 입학한 지 일년 만에 자동차 운전시험을 무난히 통과한 박경원은 곧바로 비행학교 항공과에 입학했다. 비행학교의 입학생 중 여자는 세 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두 명은 한국인이었다. 바로 박경원과 우리 항공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이정희였다. 그녀가 입학할 즈음 이미 일본 여류 비행사 두 명이 탄생하고 있었다.

그녀의 1차 목표는 3등 비행사였다. 당시 비행사 급수는 1, 2, 3등 비행사로 나눠지고 있었다. 20시간 비행 경력이면 3, 50시간은 2, 100시간이면 1등 비행사 시험 자격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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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비행사는 자가용 비행기로 운동장 주변만 비행하고, 2등 비행사가 되면 비행은 자유였지만, 조종은 자가용 비행기만 할 수 있었다. 1등 비행사가 되면 영업용 비행기도 조종할 수 있었지만 1등 조종사는 남자에 한하여 자격이 주어졌다.


‘여자는 엉덩이가 커서 조종은 무리'라는 성차별의 조롱도 있던 시대였다.’

그녀에게 후원자는 <동아일보>였다. 1925 7 9일자를 시작으로 9 4일자, 12 12일자에 연속으로 그녀에 관한 기사가 나갔다

 동아일보  1925-07-09

 

여용사 박경원양; 비행학교에 입학 그 부모의 거절과 만혼, 청혼도 버리고 단연 日本으로 건너가 비행가 지원()   

 


 
동아일보 1925-09-04

 

朝鮮 여류비행가 박경원양 필업, 朝鮮 녀류 비행가 박경원양 졸업은 하얏스나 돈업서 걱정 금전업서 면허불득()   

 

 

<왼쪽 동아일보, 오른쪽 중외일보, 당시 박경원의 고학에 대한 소회를 엮은 기사>

 

  

동아일보  1925-12-12

 

이천원이 없서서 공중정복불능, 공부는 하고도 원수의 돈이 업서서 늘보는 저하늘을 정벌도 못해, 박경원양의 고심담()   

<3등에 입상후 찍은 사진>

 

 

 


그녀는 순회 간호부와 자동차 운전수를 하며 모은 돈으로 비행 훈련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 번 탈 때마다 돈이 들었는데, 1시간에 15원이었다고 한다. 기름이 귀할 때였다. 면허증을 따려면 2천원이 든다고 했다. 당시 대학 초임이 40원일 때이고 500원이면 웬만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때였다.

어떻게 보면 이런 일련의 기사들이 박경원을 키워 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기자들이 '콤펙트파일럿'(화장하는 조종사)이라고 모멸과 멸시를 주는 가운데서도 우리의 기사들은 힘을 주기위해 안타까운 사연을 발췌하여 소개해 주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사실확인은 곤란하지만
이은(영친왕)왕세자는 구한국 정부 학부대신을 지낸 이용직(李容稙, 1852-1932, 친일파였으나 3.1운동가담으로 작위몰수)을 통해 거금을 기부했다. 이를 통해 드디어 1926 2 1일 일본비행학교 조종과에 정식으로 입학하게 되어 학업에 충실하게 되었다.

"박경원의 후원자는 의친왕 이강" - 고 서웅성 비행사 며느리 이병희씨
과연 박경원이 1시간 비행연습에 15원이 든다는 비행학교 수업료 등의 비용을 어떻게 조달했는지가 의문이다. 박경원 평전을 비롯한 여러자료에서 '이왕직(李王職, 이름이 아님)'장관(대한제국 황손의 대외업무를 담당하는 관직)과 학부장관 이용직을 통한 '존귀하신 어른'의 후원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박경원 평전>은 이에 대해 '영친왕 이은'설을 제기한다.

그런데 최근 박경원의 후원자가 의친왕 이강이라는 증언이 나와 주목된다. 의친왕 '이강'은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로 상하이 탈출을 시도한 [대동단사건] 등 독립운동에 관여한 황손이다.
다치가와비행학교를 졸업한 박경원의 후배로 항공협회 회장을 지낸 고 서웅성(1906~1997) 비행사의 며느리 이병희씨는 만년에 서비행사가 "박경원의 후원자는 의친왕 이강’"이라고 증언했다고 지난 2005 12 22일 인터뷰에서 밝혔다.
미 서웅성 비행사는 <한국일보>1981712 '끝내 못 이룬 조국 하늘 비상의 꿈(최성자기자)이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양정의숙 육상선수들이 도쿄-요꼬하마 연적경주 우승 기념으로 다치가와비행학교에서 비행기를 태워주고 촬영, 오른쪽이 서웅성, 손기정 순>


"학자금에 쪼들리던 박경원이 '어느 존귀하신 어른이 사람을 보내어 학자금을 대주마 했다. 그 어른 이름은 절대 세상에 공표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하며 몹시 기뻐하던 생각이 난다."
이 기사에서 서 비행사는 '존귀하신 어른'이 이용직이라고 증언했지만 실은 의친왕 이강이라고 가족들에게 밝혔다는 것이다.

(사진은 이병희씨) "하루는 제가 여쭈었습니다. 박경원이 당시 여자 신분으로, 그것도 식민지 치하에서 어떻게 그렇게 돈이 많이 드는 비행사를 할 수 있었느냐고요. 아버님께서는 혹시 거론되는 분들에게 누를 끼칠까 봐 밖에서는 일체 말씀을 안 하시고 그분은 바로 이강공이라고 가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naver paper castle님의 블로그에서 인용.


 

아무튼 후원에 힘입어 그녀는 1926 12 28일 일본비행학교에서 비행사 시험에 당당히 합격함으로써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권에서도 최초로 여자 파일럿이 된 박경원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영광과 명성을 한 몸에 듬뿍 안은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1903년 라이트 형제(Wright, Wilbur & Orvile)가 비행기를 발명한 지 18년 만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안창남(安昌男)이란 청년이 파일럿이 되었고, 그로부터 불과 4년만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19271월 일본비행학교 본교 졸업하고 1927년 초까지 194회 째 비행 기록을 세웠고 25시간 44분 이상을 탔다. 어떻게 보면 2년제 비행학교의 비행시간 치고는 매우 저조하다고 볼 수 있지만 당시 1회 비행이 3~5분이므로 25시간은 그렇게 짧은 시간이 아니다. 조선 최초의 여류 비행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신문기사와 자신의 자취집에서 찍은 사진>

1 29일 가마다 본교에서 졸업식이 열렸다.(동경 朝日新聞, 1927 1 30일자) 그녀는 다시 2등 비행사에 도전한다. 일본 최초의 2등 여류 비행사도 탄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해인 1928 7 12일 관동비행구락부 주최로 도쿄 시부야구(澁谷區)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제4회 비행경기대회가 열린다.
당시 일본비행학교에서는 박경원을 포함 네 명이 참가했고, 그 중 여류 비행사는 박경원과 같은 한국 여인 이정희(李貞喜, 1910-?), 그리고 일본 여자 1명이었다.
박경원은 고도상승 경기에서 3등으로 입상했다. 30분간 요요기 연병장 상공을 나는 것이었다. 2회와 3회 대회 때는 입상하지 못했으나 이번 대회에는 입상한 것이었다. 삼궁교(參宮橋)에서 시상식이 행해졌다.



<그녀의 비행대회 참가소식과 입상소식을 알린 신문기사들>


대회 참가와 동시에 비행시간이 충족되어 같은 달 302등 비행사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일부 신문기사에는 7 13일로 되어 있기도 하다.) 면허증 번호는 81번이었다. 여성으로는 일본인 두 명에 이어 세 번째였고 우리 나라 여자로는 모두 처음이었다. 그녀가 2등 비행사가 됐을 때 일본인 교장과 교관들은 “박 양은 일본 비행학교의 꽃으로서, 머리가 좋은 미인이다"고 칭찬하였다.

이정희도 2등 비행사 면허를 받았다. 이정희는 박경원보다 1년 늦게 비행학교에 들어 왔다. 1927 2 16살 어린 나이였다. 서울의 숙명 여학교를 나온 그녀는 박경원보다 출신이 좋았다. 그녀는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와 동기동창이었다.

 <당시 최승희와 손기정, 베를린마라톤 입상 후 사진>

후일 그녀의 수기에 의해 밝혀진 내용으로 그녀와 같이 동숙(자취)하였고, 박경원이 동승해서 직접 조종 지도를 해주었다.

당시 일본에서 생활하던 조종사들을 살펴보면 박경원의 뒤를 이어 이정희가 1927 11월에 3, 1929 7월에 2등 비행사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최승희의 영향으로 무용가의 길로 진로를 바꾸고 박경원을 떠나갔다. 그녀는 1930년대 초 서울 누상동에 살다가 1933 8 14일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고 한다. 이정희에 대해서는 다시 포스팅을 하여 알아볼 것이다.

그들보다 조금 뒤에 또 한 사람의 여류 비행사가 탄생한다. 그녀는 김복남(金福男)이다. 1939 3 2등 비행사가 되었다.
남자 비행사로는 당시 오사카의 일본항공수송연구소에 근무하는 장덕창(張德昌)이란 1등 비행사가 있었다. 박경원과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또한 강세기(姜世基)란 분도 있다. 그는 충청남도 출신으로 이정희와 입학 동기였다. 그는 어렵게 공부하여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땄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1929 4 18일 도코로자와 비행장에서 비행 연습을 하다가 추락사했다. 기체는 1미터 흙 속에 처박혀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시신도 마찬가지였다. 23세의 꿈 많은 젊은이였다. 이정희, 강세기 모두 꿈을 접고 있었다.

1929년 도쿄의 다치가와 일대도 변하고 있었다. 1929 4월 이곳에 도쿄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민간 정기편을 운영하는 일본항공수송회사가 이 일을 맡았다. 일본과 조선 그리고 만주를 연결하는 비행장이었다. 8인승 네덜란드제 비행기와 6인승 미국제 비행기가 투입되었다.
그해 9
10일부터 후쿠오카-울산-경성-평양을 지나 만주 대련에 이어지는 여객 수송이 시작되었다.


 시간표를 보면

아침 8시 다치가와 출항
오사카 10 30분 도착
후쿠오카 밤 12 57분 도착
새벽 2 50분 후쿠오카 출항
울산에는 4 46분 도착(후쿠오카 울산은 240km구간)
아침 7시 울산 출항
아침 932분 여의도 이착륙장 도착
다치가와에서 서울까지는 비행거리 1,500km였다. 물론 운임이 비싸 처음 승객은 호기심 많은 사람, 돈 많은 사람, 고관대작 등이었다.


 

육군 다치가와 비행장은 도쿄에서 1시간 거리로 1922년 육군이 41 5 250평의 대지를 매입해 만든 것이다. 5 비행연대의 비행장이었다. 제국도시 도쿄를 방위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하여 이 다치가와는하늘의 성지'라고도 했다비행장 공사는 히로시마의 모리타 구미(森田組)가 맡았다. 이때 많은 우리 젊은이들이 이 공사판에 투입되었다. 우리 동포들의 땀과 피가 섞여 있는 곳이다. 조선인 인부들은 삼태기로 흙을 나르고 바닥을 다듬었다. 격납고도 세우고 수리 조립공장, 막사 등도 세웠다. 1922 3월 준공되었다. 1923 12월 무렵에 이곳은 시골에서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당시 도쿄의 비행장 위치와 다치가와(立川)비행장 격납고>


 

<1979년 다치가와비행장 항공사진 및 육상자위대 본부로 변한 1989년도의 항공사진>


당시 일본 비행사들은 면허를 따면 자신의 고향까지 비행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굳어져 왔다. 그들에게는 금의환향이었다. 일제강점기의 대동아 공영의 선전 도구로도 이용되었다. 안창남의 경우도 그랬고, 박경원 역시 고향 방문을 계획하고 있었다.
1930
년 당시 일본의 2, 3등 비행사는 12명이었는데 대부분 근대식 학문으로만 여기고 최고 엘리트 자제들이 지녀냐할 교양면허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컷다.그 중에서 직접 비행을 하는 여류 비행사는 박경원 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시아의 여류 비행사를 꿈꾸고 있었다.


그녀의 친일설을 제기하는 근거로 그녀의 비행기 청연의 불하와 관련된 일화이다. <박경원평전>에 따르면 1931 4 3일 도쿄 제국호텔에서
고이즈미 마타지로(小泉又次,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조부)체신장관과의 식사초대에 다른 여류비행사들 그리고 일본항공수송의 신입'에어걸'(여승무원)과 함께 하게 되었다. 박경원은 이자리에서 신념에 찬 여권 신장론자이자 공산주의 사상에도 관심이 있었던 동료 '기타무라 겐코'와 함께 일본 사회가 여류 비행사를 '콤팩트파일럿'(화장하는 비행사'로 여류비행사를 비하하는 언론의 유행어)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아시아 항공계가 서구에 뒤처지고 있다고 장관을 은근히 압박했다. 그녀의 발언은 미모의 '에어걸' 모토야마 에이코에게 한눈을 팔던 고이즈미는 물론이고 박경원을 소개한 비행학교장 아이비타 모츠까지 당황하게 했다.

그녀는 고국방문을 위한 항공기의 불하를 원했고, 일본에서 만주까지 비행하는 계획을 주변에 얘기했다고 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고이즈미의 추천으로 도코로자와 육군비행학교로부터 비행기 살무손2A2()을 불하 받게 된다. 그녀에게는 무척 다행이었지만 이 일로 그녀는 체신대신의 입김으로..’라는 오해도 사게 되고, 개인적인 만남에 대한 내용들로 신문에 오르내린다.


<당시 불하받은 Salmson SAL-2A2 기종과 동일 기종, 프랑스에서 1918년부터 양산한 기종으로 그녀가 불하 받은 시점을 1931년을 기준으로 하면 당시의 유지관리 수준으로 보아 유추하건데 그리 상태가 좋지는 않았을 듯 하다.>

<1930년 미 육군 공정사단의 모습에서 SAL-2A2 기종의 사진을 볼수있다. 박경원의 '청연'역시 수리 후에 이정도의 상태였을 것이다.>


 

SPECIFICATIONS

Country:

France

Manufacturer:

Société des Moteurs Salmson

Type:

Reconnaissance

First Service:

1918

Number Built:

3,200

Engine(s):

Canton-Unné, 9 cylinder, radial, 260 hp

Wing Span:

38 ft 8.5 in

Length:

27 ft 11 in

Height:

9 ft 6 in

Empty Weight:

1,676 lb

Gross Weight:

2,954 lb

Max Speed:

115 mph

Ceiling:

20,505 ft

Endurance:

3 hours

Crew:

2

Armament:

2 or 3 machineguns













 

 

<영화 청연에서 그녀가 교육받던 기종으로 묘사된 기종이다. 왼쪽포스터는 보잉의 Stearman 4EM 우편배달용+PT-17의 랜딩기어개량형으로 보이고, 우측의 교육용비행기로 나왔던 기종 역시 우편배달용으로 Stearman N2S US로 미해군에서 사용하다 민간에 불하했던 것들로 보인다.>

 

 

하지만 <박경원평전>을 통해 박경원이 비행기를 불하 받은 것은 고이즈미의 "은혜"가 아니라 돈도없고 끈도 없는 박경원을 도우려는 친구 기타무라 겐코, 그리고 박경원과 같은 실력있는 비행사를 보유한 비행학교의 이미지 제고를 노렸던 비행학교장 아이비타 모츠를 통한 박경원의 끈질긴 청원에 의한 것으로 고이즈미와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당시 기념촬영사진 왼쪽 box고이즈미, 오른쪽box 박경원>


1931 8 29일에는 하네다(羽田) 공항이 개장했다. 1929년부터 하네다 앞 바다를 메워 만든 공항이었다. 다치가와의 동경국제비행장 시대는 이제 끝났다. 1967년 나리다(成田) 공항에 국제공항 지위를 물려줄 때까지만 해도 하네다는 일본의 현관이었다.


<박경원이 출발했을 당시 1933년 하네다공항의 전경과 1937년 의 하네다 공항>

그녀는 하네다 공항으로 가져온 비행기 이름을 ‘파란 제비 호'라 붙였다. 이제 이 비행기는 그녀의 소유였다. 도쿄 니치니치신문(東京 日日新聞, 1931 10 23)은 이를 보도하고 있다.

“드디어 11 20일경 정비가 완료될 전망이다. 이 조선 비행의 출발에 직접 관계가 있는 다치가와 시 및 민간 비행관계자들은 대대적으로 전송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자신의 비행기에 청연이라고 명명하고 우전(하네다)비행장으로 공중수송하였다는 기사>

※ '청연'이라는 비행기의 이름은 '청조'호 일 수도 있다. 이 글의 하단에 있는 박경원의 일기에는 자신의 비행기를 '청조호(靑鳥號)'라고 적고있다.
아마 기사를 쓰는 기자의 입장에서 뭔가 빠르고 날쎄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녀는 태평양 횡단 비행을 시행하는 것을 일생의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었다. 단순한 여류 조종사로서 인생을 마치기는 싫었다. 남자들의 편견과 조롱하는 질시도 싫었다. 그러나 태평양 횡단 비행은 쉽게 시도할 수만은 없었다.
당시의 기술수준으로 커다란 두가지의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는 여자조종사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항공기의 성능과 조종사의 기술수준에 대한 척도였다. 누구도 해본 적이 없는 태평양 횡단은 최소 12시간의 항속능력이 필요했지만 당시 일본에서 제작된 비행기의 여섯 시간 남짓의 항속력으로는 무리라고 생각되었고, 항속력이 크게 개선된 비행기가 개발되었다 하더라도 태평양 상공을 날려면 고도의 비행술이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 조차도 그 수준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태평양 횡단비행의 성공여부에 대한 예측이 어려워진 그녀는 우선 일본에서 만주를 비행해 보기로 한다.

또 다른 친일의 빌미를 만든 일만비행(日滿飛行)’ 계획이었다. 그녀의 이런 계획은 평소 그녀를 아끼던 유력인사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며 특히 비행기에 호기심이 많았거나 비행사가 되려는 사람들은 박경원의 일만비행 계획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이즈음 그녀의 후배로 윤창현(尹昌鉉)과 윤공흠(尹公欽)이 입학한다.
후배인 윤창현은 1931 7월 일본비행학교에 입학, 11 2등 비행사가 되고 1932 5 15일 다치가와에서 날아 조선해협을 건너 서울로 갔다.
윤공흠은 윤창현보다 한달 뒤 입학하여 1932 6월 초순 2등 면허를 땄다. 그는 조선으로 비행 중 히로시마에 불시착한다.
그 후 다시 순조롭게 고국방문 비행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조선 남자 비행사들과 달리 고국방문비행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후진을 양성하면서 자신의 고국방문 비행을 꿈꾸지만 자꾸 미뤄지고 있었다.
오히려 후배들에게 자꾸 밀리고 있는 불안감에 초조해 하였는지도 모른다.


바로 비행할 수도 없는 쓰다만 군용기를 불하받은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수리와 정비 및 비행경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할을 해준 기타무라 겐코가 복막염으로 사망하게 되고, 유일한 스폰서(?) 였던 고이즈미 마저 하마구치 내각에서 이누카이 내각으로 바뀌면서  사임해 버림으로써 박경원의 고국방문 비행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 집안의 딸 기베 시게노는 이미 1927년 보란 듯이 진남포로 고향 방문 비행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만비행' 33세 노처녀 비행사 박경원에게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기회였다.
그러나 주최 측은 '1등 비행사'규정을 들어 그녀의 청원을 거절한다.

게다가 [일본부인항공협회]는 박경원의 비행학교 4년 후배에다 비행 경력도 짧은 스물한 살의 우에다 스즈코일만비행을 추진했다.
그 시점에 자격이 있는 일본의 여류 비행사는 최고참 박경원과 우에다 스즈코, 갓 자격증을 딴 신참 합쳐서 셋 뿐이었다.
일본의 의도는 일만비행은 청순가련형의 '순수한 일본여성'이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결정이 바뀐다. 그녀에게도 고향 방문 비행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일본부인항공협회] 이사장이 사기협의로 고소당해 우에다 스즈코의 비행이 취소되자 [제국비행협회]는 부랴부랴 박경원으로 조종사를 교체하기로 결정했다.


1933
5 4일은 박경원에게 운명의 날이었다
일본육군항공
창설 25주년을 맞아 다치가와 제5비행연대에 '일왕'이 방문하고 비행학교 교장인 아이바타 모츠가 [제국비행협회]에 호출된다. 제국비행협회가 박경원의 만주비행을 후원하겠다는 결정을 했던 것이다
.

박경원은 후일 자신의 친일의 논란을 일으킨 일본제국주의 비행사 최고의 영예인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日滿親善 皇軍慰問 日滿連絡飛行)'의 비행사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이전에 어떤 조선남자 비행사나 일본인 여류 비행사에게도 붙인적이 없었던 명분, 아니 조건이엇다.
박경원의 입장에서 더이상 미루거나 물러설 수 없다는 것을 제물로 삼아 그녀가 꿈에도 그리던 고국방문비행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박경원에게 그것은 오로지 고국방문 비행일 뿐이었다.
그녀는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 연락비행
(日滿親善 皇軍慰問 日滿連絡飛行)'이라는 이름으로 비행을 해야 했다.
군국의 냄새가 물씬 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녀의 고국 비행은 조종사에 뜻을 둔지 13, 일본비행학교에 들어가서 9, 2등 비행사가 되는데 5년이 걸린 후였다.
그녀의 원대한 대양횡단 비행의 꿈을 향한 첫 걸음이었다.



<당시 그녀의 모국방문 비행을 보도한 기사들>

하지만 이런 소식은 국내의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자 그녀는 조국하늘이 아닌 만주부터 날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당연히 그녀의 비행 계획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만주로 가기 전에 고국방문과 시범비행을 계획하고 결정하게 된다.

그녀의 고국방문 비행의 시범비행 장소는 여의도 비행장으로 정하고 여의도 행사의 준비는 고 서웅성 비행사가 준비하였다.
서웅성 비행사는 10일 빠르게 고국으로와 여자비행사의 역사적인 고국방문 시범비행에 따른 환영절차 등을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1933
8 7일 이날은 이른 아침부터 여의도가 바라다 보이는 한강 둑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국인 최초의 여자 비행사 박경원이 비행기를 몰고 여의도에 나타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차츰 정오를 향해 흘러가자 한강 둑은 온통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전 10 35분 박경원 비행사는 하네다 비행장을 이륙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서웅성 비행사는 확성기로 구경나온 사람들에게 알렸다.

"
동포 여러분! 우리의 자랑스런 여비행사 박경원 비행사의 애기 청연(靑燕)은 조금 전에 하네다공항을 무사히 이륙하였답니다. 다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
만세! 우리 조선 만세!"

어떤 아낙네는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줄 모르고 있었다.
확성기에서는 계속해서 서웅성 비행사의 음성이 힘차게 울려 퍼져 나오고 있었다.

"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여비행사 박경원 비행사의 애기 청연은 오포가 울릴 무렵이 되면 우렁찬 프로펠라 소리를 내며 저 서쪽 하늘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 날씨는 아주 좋지 않았다.
좋지 않은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으나 일정 상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기수는 도쿄를 벗어나 가와사키 공장지대 상공을 지났다.
도카이도선(東海道線)의 선로를 건너 에노시마(江ノ島)를 지났다.
별장과 해수욕장이 즐비한 오다하라(小田原) 상공을 지나고 있다. 고도 400-500이었다.
아타미를 지나 하코네 산을 넘는다. 비행 40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빽빽한 구름과 난기류가 그녀의 비행기를 둘러쌓다.

그녀의 비행기는 11 17분 하코네의 남쪽에서 폭음을 울린 후 사라져 버렸다.

하코네 항공 무선소에 폭음이 들려 왔다.

얼마 후 시스오카 현 전방군(田方郡) 다하촌(多賀村) 상다하(上多賀) 현악치(玄岳峙)에 기수를 거꾸로 밖은 채 그녀의 비행기가 발견되었다.
시계는 11 25 30초에 머물러 있었다. 이륙 후 50분 후였다.

그녀는 가슴을 강타 당한 채 조종석 핸들을 잡고 비스듬히 앉은 상태로 거의 상처 없는 충격사였다.

<당시의 사고를 보여주는 한장의 사진>


모든 꿈은 사라졌다.


"
고국 방문 비행을 마치는 날에는 더 바랄 것이 없는 몸이니 생명과 육체를 분해시키겠노라"고 했던33세의 짧고 힘찬 그녀의 생애는 마감됐다.
 

그를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의 추락사를 알린 당시 기사>



4
일 후인 8 11일 제국비행협회 강당에서 장례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그녀의 유골은 3일 후인 14일 오전 10 47분 대구역에 도착해 불교 포교원에 안치되었다.


<당시 그녀의 장례식과 대구포교당 안치 관련기사들>



<대구에서 열린 추도회광경 과 유가족>


조난당한 그 자리에는
사고 1주년이 되던 날 [1933년 박경원양 조난위비] 라고 새긴 돌기둥이 세워졌다. 후일 비석에 손상이 생겨1981우에타카 마을회는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


<왼쪽: 하코네산에 있는 박경원 사고장소안내 이정표, 가운데 최초의 조난위비, 오른쪽: 1981년에 세운 새로운 비석>



1983 8 7일 아타미 의왕사에서 '박경원 추락사 50년제'가 열렸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서울에서 태어난 일본의 진보적 여성학자 카노 미키요가 쓴 <박경원평전>, <일본속의 한국 근대사현장> 목원대 김정동교수를 통해서 짧은 생애에 대한 기록들이 쓰여져 있다.

 
     
카노 미키요 - 일본의 진보적여성학자로 194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교토대학 사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케이와학원 대학의 교수로 있다.
1976
년부터 지금까지 '여성의 오늘을 묻는 모임'을 이끌며 연구 저술 강연 여성운동 천황제 반대운동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는 일본대륙침략과 민족말살 정책이 본격화되던 때에 굶주린 '조센징'이이들의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육군관사에서 태어난 포동포동한 아기였다는 지은이는 이책을 쓰면서 '내가 무슨 낮짝으로' 하는 자격지심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동안 일장기와 전범들의 꽃다발 속에 가려져 왔던 박경원의 참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10년에 걸쳐 이책을 썼다.

☜ 그녀의 저서인 <박경원평전>-[건널수 없없던 해협]


 

아래 글은 별건곤 제66(1933 09 01) 이정희씨가 쓴 수기입니다. 문체가 당시의 문체임을 아시고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오호(嗚呼)  朴敬元孃 참변(慘變), 꿈 가튼 일입니다. - 李貞喜


하여간 사람에게는 사정이라는 것이 퍽도 만흔 것입니다.

한 학교에서 굿세게 서로 손목을 잡고 우리의 힘으로 장쾌한 창공의 사업을 이루어보기 몃번이나 몃번이나 맹서를 하고도 나는 나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중도에서 비행기의 「핸들」을 놋코 별별 다른 경험을 하얏스며 요지음은 손톱만한 무슨 일로 긴치 안캐스리 세상의 이야기꺼리가 된 바도 잇습니다.

말하자면 어느 나라를 물론코 여비행사(女飛行士) 하면은 히귀한 존재이겟스나 우리 조선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고, 그러한 의미에 잇서서 장황한 설명을 필요치 안코 우리의 서로 서로 람보다도 그와 나와 두 사람의 사이에는 서로 알고도 넘치며 뭇지 안코도 이해할 포부가 잇서 우리를 은연중 친밀케 하엿스며 우리의 오날날까지의 성장, 성장하기까지의 남들은 이해못할 가지가지의 쓰듸쓴 경험 이런 것은 그의 것이 나와 흡사하겟고 나의 것이 그와 흡사할 것이며 그러한 자디쟌 긔억을 그를 일허버리고 넉 업시 안저 잇는 지금에 뒤푸리한다면 오- 그것은 나의 눈물을 새암이 솟는 물갓치 맨들게 할 뿐의 그것이옵니다.

 

「나만은 참으로 참 마음으로 그의 성공을 빌고 잇섯지요」 

「나만은 참으로 참 마음으로 그이만의 성공은 빌고 잇섯습니다!

 

「아- 그래 그런대!「그런대 그게 무슨 비극입니까? 생각도 못할 참변이옵니까?

 

그와 나와는 동경으로 가서 대정 15(1926-필자 주)에 입천비행학교(立川飛行學校)에 들어가서 우리가 3 2등 비행사의 자격을 엇고 책임이 더욱 중하여지는 동시에 또한 은근하게 남에게 자랑도 되는 여류비행가의 영예를 엇기까지 4년 동안이나 가치 공부하고 연구하엿스며 바다가치 퍼런 한울을 향하야 우리의 만만한 투지를 펼쳐며 손바닥 치고 용기를 북도드며 나아갓든 것이옵니다.

4년 동안 지내는 사이 가튼 길을 걸어가는 동지인 까닭에도 잇섯겟지마는 우리 둘이는 서로 어떠케 정이 들엇서는지 친형제나 달음 업시 지내엿습니다.

 

「오- 그는 나의 경원언니엿습니다!

 

그는 금년에 33 세상사람들은 녀자 나히 서른셋이면 남자 환갑 지낸 것과 달음 업시 보겟지오마는 우리는 그러치 안습니다. 우리가 우리 의지금 나히를 먹기까지 그 동안의 긴세월 그것을 눈꼽만치도 헛되임 업시 정성껏 우리의 일에 밧첫슴으로 조금도 뉘우침 비슷한 마음이 업는 것은 물론 우리는 우리가 살아 잇는 날까지 마음과 기운을 다하야 창공과 싸왓슬 것입니다. 다른 녀자들에게 잇서서는 녀자의 나히 서른셋, 이것을 별다른 의미에서 안타까워하겟지마는 우리는 안타까움보다 굿세엿스며 종래의 그 가튼 관렴으로 우리의 나히를 생각하는<8>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보다 훨신 연장인 경원이가 참으로 그러한 의지엿섯지요. 그는 꿋꿋하엿습니다. 학교에서도 가치 지냇슬 뿐아니라 립천본정(立川本町)에다 우리는 집 한 채를 빌어가지고 자취생활을 하며 지내엿스니까 그의 가지가지 잔성질, 큰 마음 할 것 업시 나는 그에게 대한 것은 죄다 알 수가 잇섯든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잘 알 수 잇게 보여준 그의 성격은 무엇보다도 쾌활하다는 것 꿋꿋하고 억세인 것 굽히지 안는 것 그것이엿습니다.

서양의 어떠한 영웅은 「임퍼시블」이라는 단자를 사전(辭典)에서 빼버리라고 한 일화도 잇는 바이요. 또한 흔히 세상에는

 

「할랴고 들면 안되는 것이란 업다!

 

하는 의미의 말이 하구 만히 류행하고 잇지마는 경원은 늘 다음 가튼 말을 하엿답니다.

 

「할랴고 들면 안되는 것이 드물다!

 

이것만을 들어보아도 그의 성격이 여간내기 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잇지 안습니까? 그는 세상의 모든 일 처노코 할랴고 들어 자긔의 마음과 정성을 밧치기만 하면 안되는 것이란 퍽도 드문 것이라고 외첫습니다. 씩씩한 의지입니다. 그러키 때문에 어느 때나 그에게는 푼푼한 자손심과 과분한 자신이 잇섯다고 볼 수 잇섯든 것이며, 그러한 그것이 그의 성격의 장점인 동지에 때와 경우를 딸하 단점으로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엿스며, 그의 오날날의 찬연한 업적도 그의 그러한 성경의 선물이엿든 것이며, 천만 애닯은 일이오나 이번의 그의 참변 또한 그의 그러한 성적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잇는 것입니다.

 

이번 참변이 잇슨 후 어느 신문에는 참변의 원인이 그의 기술(技術)의 부족에서 생겨진 것가치 싸워진 일이 잇스나 그것은 천부당 만부당이고 그날의 대단히 「컨듸숀」의 좃치 못한 것은 물론 절대로 위험한 일기라는 것을 빤히 알엇슬 터인대도 중지하지 안코 한 번 작정햇든대로 시행하고 말녀는 그의 분수 업는 분투심이 작화한 것이라고 밋는 바입니다.

출발할 때 비행학교 교관(敎官) 복견신일(伏見信一)씨가

 

「위험할 듯하거든 무리한 일을 피하고 즉시 돌아오시요!

 

이러틋 충고를 하얏섯다는대 엇재서 경원 그는 그 말을 듯지 안햇섯든가? 기술자(技術者)가 손톱만치라도 가저서는 아니될 자만심 분수업는 투지, 무리(無理)를 하는 마음, 이것이 좀 적엇드래도 그날의 일기가 비행에 아무리 고약햇고 그 지방이 어떠케 위험햇스며 또한 교관의 충고가 업섯다 처도 그는 다시 대지(大地) 우에 내리는 사람이 되엿슬 것이올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가지고 그를 원망하는 마음보다 전광석화가치 부디쳐 눈물을 쏫게 하는 슯음이 압흘 습니다. 나의 사정 그의 사정이고 그의 사정이 또한 나의 사정이엿슬 것입니다. 우리가 수억의 돈을 싸어 노코 심심푸리로 하는 것이 아니요, 천신만고를 맛보며 나아가는 우리의 길 압헤 우리가 초조(焦燥)하지 안코 백일 무슨 미덤직하고 호화로운 후원(後援)과 기회(期會)가 잇슬 것입니까?

 

만일 그의 모든 것이 마음대로 하고 십흔대로 반만치나마 풍부하엿던들 하고 생각할 때 가슴이 어이고 눈물과 슯흠이 압슨다는 말이올시다. 여러 가지 이 이야기는 그만두고 그가 중간에 학자가 업서저서 퍽도 애를 쓰며 돌아다닌 일이 잇섯스며 남몰을 슯흔 에피소드가 만헛다는 이것만을 가지고도 그간의 경우와 그의 심정을 얼마침 이해할 수가 잇슬 것입니다.

 

명치 34(1901) 경상북도 대구(慶尙北道 大邱) 덕산정(德山町) 63번지에서 그는 출생하엿다고 합니다. 대정 5 3월 대구부 사립명신학교(私立明新學校)를 졸업하고 9 3월 횡빈(橫濱) 기예학교(技藝學校)를 졸업하엿스며 어릴적 고향에서는 어떤 병원의 간호부로 잇섯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기한 바와 가치 대정 15년 나와 가치 입천비행학교에 입학하엿섯스며 소화 2 1월에 3등 비행사가 되고 3 8월에 2등 비행사가 된 것입니다. 그의 비행시간(飛行時間) 2백여 시간을 헤일 것이며 민간비행경기회(民間飛行競技會) 4번이나 참가하야 한 번은 입상(入賞)까지 하엿습니다.

 

그러나 그가 애지중지하든 「살무송」 비행긔 「푸른제비」(靑燕)는 지금에 산산히 깨여저 버리여 잇고 소화 8(1934) 8 8일 오전 8시에 일본 정강현 전방군 다하 촌현곡(日本 靜岡縣 田方郡 多賀 村玄谷) 동남쪽 송림 사이에서 그의 무참한 죽엄이 발견된 것이옵니다. 그 장소는 다하 촌에서 2백리 항공등대(航空燈臺)에서 남방 1백리 2천 척()이나 되는 험악한 산허리엿든 것이옵니다. 경원의 시게를 꺼내다보니 11 25 30초에서 세여저 잇섯다 하니까 그가 사고당한 시간은 그 사이의 몃초 동안이엇을 것입니다.

이번의 ****의 비행이 마추어 진 후에는 곳 뒤를 니어 구주방문(歐洲訪問)의 장거가 그의 손으로 되엿슬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할사록 그의 씩씩하던 전일이 그리옵고 그의 구만리 장천의 창창한 압길이 앗까워 못내 슯허질 뿐입니다.

 

「경원언니 지하에 안녕히 주무시요!

 

그의 명복을 빌며 기록할 이야기는 압흐로도 끗이 업슬 거이나 이만 붓을 놋습니다.


 

 <당시 신문에 쓰여진 애도의 글 들>

 

마일즈리즈양이 강원도 춘천에 불시착 한 후 그녀의 어머니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돈을 부쳤다는 내용.

 잡지명 별건곤 제72(1934 04 01)

 

불란서 공중의 녀류용사 「마리즈 일즈」양은 제2차의 訪日비행을 완전히 성공하고 江原道 春川 불시 착륙하엿다가 京城 것처 지난달 24일에 자긔 나라로 도라가든중 얼마전 장거리 처녀비행을 하다가 무참히 추락 참사한 朴敬元양을 크게 동정하고

「하눌을 집으로 삼고 단이는 우리 비행가로서 이번에 우연히 춘천에 불시 착륙되엿슬 때 박양의 생각이 가슴속에 갑히 떠올라 동정의 생각을 검할 수 업슴으로 그 유족들을 위로하는 의미로 약소하나마 이 돈을 보내달라」는 열렬한 편지와 함께 금일봉을 체신국장에게로 보냇슴으로 동 국장은 이를 감사히 생각하고 곧 대구에 잇는 박양의 어머니에게로 보내주엇다 한다.


 

 잡지명 삼천리 제5권 제9(1933 09 01)

 

佳人 受難時代 (가인의 수난시대)

 

女流飛行家 朴敬元 고향인 大邱 방문 겸 滿洲 방문비행하든 도중, 箱根附近에서 그만 烈風 때문에 墜落慘死하고 마럿다, 前者 安昌男氏 기억하는 우리는 공중 날느는 鳥人들이 거듭 당하는 불행에 슬퍼한다.

 

女流飛行家 말이 낫스니 말이지 李貞喜 요 일전에 음독자살 하려다가 未遂하엿다 한다, 獨逸 醫學搏士 지금 上海 가 잇는 O鎔氏 사랑하는 사인데 그 사이의 엇던 슬푼 일로 人世 비관하여 그리 하엿다하나, 眞僞 未詳이다.


 

 

! 다음 내용은 수집된 자료이지만 어느 정도 실명이 거론되지 않은 점을 두어 올려봅니다.
잡지의 가십거리였을 수도 있으니 내용을 두고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기름값을 만들기 위해 걸었던 그녀의 심경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잡지명 삼천리 제8권 제4(1936 04 01)

 

鄕土飛行 南柯春夢! 薄命 女流鳥人 朴敬元孃 秘戀悲史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 昭和 8 8 7일로 돌아간다.

연약한 일개 여성의 몸으로, 더구나 완고한 가정과 리해없는 사회에서 누구 하나 돌보아 주는 이 없건마는 실로 악전고투, 日本女流鳥界 나선 지 만 10년을 맞이한 朴敬元양은 오래 오래 머리ㅅ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품고 있던, 鮮滿飛行 壯途 올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금, 행운의 월계관을 쥐고 승리의 관문으로 달려가는 이 양에게 「운명」의 작란은 웨 이다지도 애처러웠던 ? 덧없었는가!

모든 고난과 쓰라림을 다- 물리치고 10년의 宿望 이루기 위하야 용감스럽게도 그 문 앞에 나선 양의 꿈은 애처롭게도 영영 그만 깨여저 버리고 말었다.

그 연약한 뭄둥이와 마음을, 대담스럽게도 창공에 내여거러, 쓸쓸한 우리 女流飛行界 바치든 바 힘은 위대하었고, 그 얻는 바 기쁨이 없었던 양이, 이제 세상을 떠나간 지 세월조차 덧없어 於焉 3! 아직도 哀惜 정이 새로웁다.

너무나 고달펏던 그의 生涯!

너무나 짮었던 그의 一生!

아무리 허구픈 운명의 회호리바람이기로서니 아직도 채 피기 전인 한 떨기의 꽃 송이를 그다지도 못피게 떨어트린단 말가!

세월은 덧없이 흘러 해ㅅ수로 세번을 꼽건만은 아직도 양의 가버린 자취는 더욱 새롭구나!

이제 나는 生前 양과, 양이 깨끗한 사랑을 세상사람 몰래 은근히 맺고 있었던 그 당시 一般空學生 S군과의 日記책을 뒤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양이 품은 채로 영영 가버린 秘戀 哀史 다시 적어 靈前 바치노라.

 



昭和 8 8 X.

朴敬元양의 民間葬 東京』의 XX에서 집행되던 날.

극히 미미하고 조고만한 일이 생겼으나 아무도 이 일을 로히 유심히 여기지를 않고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뜻밖에도 그 일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왜? 너무도 조그마한, 문제꺼리도 안되는 일이었던 까닭이었으므로―각 방면의 대표들의 弔詞 한참 낭독되는 가운데, 대학의 제복을 입은 한 學生, 달려들어오며 자기의 弔詞 읽어 달라고 하는 있었다.

그 때, 弔詞낭독을 맡어보던 사람은, 미리 않은 弔詞 안된다고, 단번에 그 청을 거절하여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 대학생은 재삼 그 사람에게 간청하엿스나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학생은 쓸쓸히 돌아서 자리를 물러나갔던 것이다.

 

그러한 지극히 조그마한 일이 한번 있은 지 1년이 지난 이듬해 昭和 9년 여름 어느 날의 일이었다.

양이 東京 건너가 있는 동안 오래오래 하숙하고 있던, T비행장 부근의 下宿屋 1에서, XX비행학교의 格納庫 한편 구석에서부터 두 종류의 日記 뭉텅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 두 개의 일기장이, 일직이 가버린 양이 생전에 가슴 속에 품고 있던 悲戀 줄이야!

한 개는 양의, 다른 한 개는 OO항공연맹의 1멘버- S(民間葬날에 자기의 弔詞 읽어 달라고 청하던 그 학생)의 일기장이었다.

이 두 종류의 일기 책을 손에 쥐고 나의 지식과 상상으로 補綴 輯錄하여 간다면, 뜻밖에도 그 民間葬 當日 의문을 풀어버릴 것으로 믿는다.

그러면 S군은 그날에 무슨 말을 할랴고 하였 든가? 양과 S군과의 관계는?

나는 이 두 개의 일기가, 이 땅 女流 飛行家 No.1양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참담한 가수업과, 세상 사람들이 몰래 고히 간직하고 있던 번민과 비애를 말한다면 그만일까 한다.

 



A, 朴孃 日記 

 

X X

오늘 M 單獨祝賀宴 格納庫에서 열려, 나는 퍽 잘 먹었다.

호기스러운 祝宴이었다.

―이제부터 계속해서 타볼 (飛行機) 결심이 있어요?

―네-,물론이죠, 그렇지만 난 모-던 교양(敎養)을 한 개라도 더 얻게 된 것이 만족이얘요.

M 생각도 이러한 것이었다. 혼자 쓸쓸히 하숙방에 돌아오니, H에게서

T와 결혼합니다. 中途 비행기를 배우다가 그만 두었지만, 도리혀 내게는 여러 가지로 리로웠어요.

하는 편지가 왔다.

女飛行士 또 한사람 비행장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만치 굳은 결심을 말하던 H 결혼! 호기스럽게 타기를 시작하던 M 비행기를 다만 근대 여성의 하나로서만이 생각지 못하는 것이 서글펏다.

그러나! M 둘러쌓고 있는 세 사람의 후원자 중에서 다만 한사람이라도 좋다고, 나는 늘-생각하고는 한다.

 



X X

오늘 분량을 써 넣으면,

아바로…… 120시간 23

안리오… … 64시간 25

사룸손… … 48시간 52

   …… 233시간 40

이 된다. 이 가운데서 自力으로 공부한 최초의 100시간을 제하고, 남은 133시간은 후원자들의 조력으로 탔다.

24로부터 32까지 敬元 청춘 8년간의 代償 겨우 이 비행시간인가고 생각키울 때한 사람 앞의 완전한 비행사가 되여 염원의 訪鄕飛行 단행할 만한 오늘에 와서는 누구 한사람 후원자 될 만한 이는 없어지고 말었구나!

(비행기의 연습비는, 아아 비싼 것이라고 생각된다!)

 



X X

X 후원회로부터

「한번 歸鄕해라, 多少間 調達 수 있다」

라는 귀ㅅ겨레 지나는 말 같은 편지를 받었다.

明日, 東京 출발한다.

 



B, S 日記 

 

X X

母校 野球 응원하려 날었다가 불시착이다.

深綠多摩川沿邊에까지 왔을 때 갑작이 발동기는 정지되어 버리고 말었다.

앞 좌석에서 교관이 창백하여진 얼굴로 들려다 본다. 대지가 猛然 스피-트로 肉迫하고 있을 때

-.

긋뿐, 다음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얼마 후, 그 부근의 어느 큰 농가의 방안에 내 몸이 뉘여져 있는 것을 알었다.

에여쁜 여자가 있어서, 8째에 2死後 2走者, X 打者에게 好打 당하여 7 6으로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머리가 조금 다첬을 뿐으로 그 뒤 얼마 안되어 자동차로 合宿 돌아왔다.

朝鮮에서 K(敬元)씨가 돌아오면 불시착의 경험을 자랑하자!

 



X X

G로부터 수신.

-슨 최후의 X와의 시합에서 惜敗 것은 여러 가지로 큰 교훈이었다.

전부터 돌보아주시는 P부인, ―同鄕 선배부인의 팬의으로 실패를 비꼬아하는 말을 듣게된 것은 일생을 두고 이즐 수가 없다.

나는 문득, 후원자라고 하는 것에 대하야 어쩐지 격렬한 분노를 느끼게 된다.

 

저녁 때, 연습을 마추고, 格納庫에서 또 비웃음을 받었다. 너머저서도 그냥 일어나지를 못하였다고?

불시착을 하여 어여쁜 Y 친하게 된 연고이겠지!

Y!…Y!

어찌되었던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C, 朴孃 日記 

 

X X

두달만에 돌아왔다.

후원회에서는 OO 맨들어 주었으나,<283> 아직 OO 부족된다. 비행기는 R3이 아니면 뿌스·모스를 가지고 싶지마는 도저히 될 수 없는 일이다!

 

X X

살모손이 겨우 내 손에 들어왔다. 깨끗하게 수리하여서 『靑鳥號』로 이름을 붙였다.

新京까지의 까소링代旅費 드는 돈이 이제 OO 채 못되어서 아무 도리없이 멍-하니 생각하고 있노라니,

―우리집으로 오세요, 좋은 이야기가 있을 테니―.

M에게 꾀임을 받었다. 명랑한 M 서로 이야기라도 해보고 싶어 딸어섯다. 豪奢스러운 그 여자의 생활을 보고, 화려하였던 자기의 젊은 시절을 도라다 보니 좀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좋은 후원자를 소개해 줄까.

―누구?

―마음이 있으면 어떼? F씨 말이야.

F씨라는 말을 듣고 놀랐다.

―그이면은, 조선비행의 燃料代쯤은 대여줄 쭐로, 난 알어요, - 어떼요.

M 친절히 내게 여러 번 권하였으나 卽答 안하고 그 길로 도라와 버렸다.

나는 여러 번 생각하여 보았다! 그것은 역시 S에게 대한 일을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맨들어 놓은 계획이 겨우 얼마 안되는 비용으로 어쩔 줄을 모르고 헤매는 줄을 잘아는 M F씨를 소개해 줄랴는 호의만은 좋으나 S를 알게 된 뒤 부터의 자기에게는 도저히 그러한 용기는 나지 안는다.

그렇다고 해서 F씨의 후원을 끊어버리면 달리 비용을 얻을 만한 데도 없는 일이지만!

 

, M 집에서 도라와, 2층으로 올라갈랴할 때, 내 방문 우으로는 분명히 두 개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섰을 때, 그 두 개의 그림자는 서로 점점 닥아 붙는 것이 역역히 보었다!

―안녕하십니까.

소리를 질르니, S가 먼저 뛰어 나왔다. 방안에는 귀엽게 생긴 여자, 그 여자가 S가 불시착이 되었을 때에 누어 있던 집 Y 엿음을 곧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놀러왔다가 주인이 없어서 그냥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모처럼 찾어 온 그들에게, 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핑게로 돌려보내고 말었다.

소개를 받은 F씨를 단념하고 도라온 나는, S Y와의 남다른 사이임을 보았을 때, 숨이 맥히는 충동을 받았다.

그냥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쓸어진 것을 억지로 참고, 간단한 인사의 말은 겨우 건니웠으나, 젊고 어여쁜 Y 보고는, 세 사람이 한자리에 오래 對座 있을 용기는 나지 않었다.

(S에게 사랑을 구할 자격이 내게 있을까?!)

이것은 말치 않어도 대답을 얻을 문제인데도, 나는 이제 새삼스럽게 새로운 문제로써 번민 하기 시작하었다.

몇번이나 잊을랴고 하여도, 생각을 고쳐먹을랴고 하여도 안되는구나!

 



X X

靑鳥號』는 검사를 끝마쳤다.

대담하게 날러 보았으나, 발동기의 기능은 그만하면 OK. 에서 내려오니 학생들 한테서,

―그만한 기량이면 玄海灘 건느는 것 쯤은 문제도 안됩니다.

라고 칭찬하여 준다. 처음으로 자기의 비행기를 가지게 된 기쁨이란 각별하다.

테스토를 끝마치고, 機體 化粧 마치고는, 처녀의 살결과도 같이 탄력있는 『날개』에다 뺨을 문지르며, 자유롭게 날러주는 愛機 감사하였다.

(나의 연인은 비행기. 창공은 즐거운 가정이다. 쓰라린 일, 불유쾌한 일, 모든 것을 하날 높이 떠있을 때마는, 잊어버리는 것이다!)

―어데, 가고싶지 않어? F씨한테.

M 억개를 나란히 하고 힘이 있게 하숙방으로 도라왔다.

 



X X

―허-, 잘 오섰구면요.

F씨는 여간 반갑게 대해주지를 안는다.

―비행할 준비는 다- 되었는지.

―네, -그런데,

―알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F씨는 공개된 자리에서 보는 바와는 더욱 젊어보였다. 얼마 후 나는 F씨를 딸아 X호텔의 2 1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세 시간이 지난 뒤 하숙의 쓸쓸한 방바닥에 피곤하여진 내 몸둥이는 힘없이 누어 버렸다. 모든 것을 각오한 바이니, 이제 새삼스럽게 무엇을 후회하며, 누구를 원망할 소냐!

(다만 내 계획만 달성하면 그만이다.<285> 이로써 준비는 다- 되었다. 인제는 날늘 수 있다! 비행할 수가 있다!)

한 장의 小切手 쥐고서, 혼자서 狂人과도 같이 부르짖었다.

 



X X

明日, 羽田 出發 결정. N씨에게 작별의 인사차로 갔다.

―어떻게 준비가 잘 되었군요.

―네, …겨우 겨우.

내 눈가슭으로는 뜨거운 눈물 방울이 쭈루루 흘러내렸다

敬元 8년 간의 모든 辛勞 잘 아는 N씨의 한마디 말에 나는 제절로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눈물을 떨어트리며 흥분한 가운데서 짖거리던 내 말을, 잠잠히 듣고만 있던 N씨는 말하었다.

―자기로서 슬픈 여자라고 생각하나요?

―아-니요, 지금은 거저 계획하던 목적을 달하게 되어서 기쁠 뿐이얘요. 「센치멘탈」이란 것은 한갓 건방진 짓으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어요.

라고 나는 힘있게 말하었다.

 



D, S 日記 

 

X X

이륙은 참으로 훌륭하었다.

箱根』은 갑작이 흐려서 視度 알 수 없으므로, 상황을 보아서는, 伊豆」를 도라갈 각오로 날렀다. 비행장에는 萬餘 군중으로 끌코 있었고, 한켓지와 모자를 두르며 만세를 불렀다.

나와 Y씨와는 機體 쌀악()만치 되여, 남쪽의 창공에 사러질 때까지 한캇치를 휘둘으면서 전송하였다.

그 뒤부터 K(敬元)씨의 소식은 영영 끊어지고 말았다.

正午 大阪 도착될 예정이었으나, 도착되지 않었다. -各地 照會 전보를 첬으나 아무데서나 한가지로 「機影 안 보인다」하는 返電 뿐이었다.

점점 불안은 쌓여저 간다. 학교의 여러 사람들은 밤 10시까지 格納庫앞에 모여 서서 情報 기다리고 있었으나 역시 아무런 소식조차 없다.

10시 반, 단념하고 散會.

 



X X

오전 10, 大阪 도착된 여객기로부터 1伊豆玄嶽 山中 飛行機 墜落되었다.」 계속하여 靜岡縣 A로부터, 敬元墜落慘死 確報 있었다.

저녁때 현장으로부터 情報 왔다.

敬元 좌석으로부터 상반신을 앞으로 디리우고 무참히도 즉. 降雨 말미암아 「箱根」을 못 넘고 「伊豆」를 도는 도중 視界 전연 없는 관게로 盲目飛行으로 날르던 순간 「玄嶽」의 山腹에서 충돌된 모양이다.

명랑한 鮮滿訪問飛行 문압에서 그만 무참히도 지터벌일 줄이야, 누군들 꿈이나 꾸었으랴!

그 기량과, 그 경험으로 12분의 自信에서 출발한 그였으나, 불행하게도 天候 급변은 양에게 최악의 비극을 가저다 주고야 말었다.

憧憬 訪鄕飛行 殉死하여 버린 K(敬元)에게는 부족이 없었을른지는 몰라도, 그렇게도 우리 여성의 손으로서 최초의 內鮮連絡, 玄海灘 翔破 단행하고 싶었다.

K씨의 하숙방에는, 이 불행을 미리 각오하고 있었음인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아무 뜻없이 그 책상설합을 열어보니, 角封套 나왔다.

나에게

실패하여 만약 도라가지 못하게 되면 읽어주어요. 하는 글이 씨여저 있다.

나는 意外 마음을 까라 앉히고 천천히 봉투를 뜯었다.

 



X X

오늘이 K씨의 民間葬.

최후로 남긴 편지로서, K 자력으로 수업한 8년 간의 辛酸 처음으로 안 나는 긴-弔詞 써가지고 식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식은 거지 반 끝이 되어가는 중이 되어서, 마침내 弔詞 읽어 주지 않었다. 기어히 읽어 달라고 부탁하었으나 역시 틀렸다.

몇 사람의 名士들은 화려하든 K 一面 찬양하기도 하고, 女流空界에의 공적을 칭찬하는 弔詞 읽었으나, 아무도, 여자의 연약한 두 손으로, 비싼, 230시간의 연습비를 버는 苦心에는 한 사람도 接觸 사람은 없었다.

식장에서 도라와 나는, 弔詞 다시금 읽어보았다.

230시간의 記錄, 청춘 8년의 피의 結晶이었든 것을 생각하면, 다만, 오로지 蒼天 한 몸을 바친 K 앞에 머리가 수그러질 뿐이다

역시, 세상의 후원자 된 사람들에게 대한 격분을 참을 수 없다. 燃料代 주기를 조건으로 하고 F씨는 무엇을 하였던가? K 하여금 다른 번잡한 문제에서 떠나, 자유롭게 날을 수 있게 할 好意 없었는가!

너무도 덧없이, 애처롭게 가버린 K 죽엄 앞에는 후원자의 책임도 있을 것이다.

 



X X

G에게 發信.

오늘이 K 간지, 35.

요사히에 와서야 겨우겨우 K 마음을 알게 되었다. Y와는 1년 간 交際中止 약속하였다.



이글을 쓰고 나서 나는 이렇게 말한 것 같다.
참 처절한 인생이었구나...
그녀에게는 자존심 보다 한(恨)이 있었던 것 같다.
원대한 꿈을 향해 진일보 해가던 그녀의 도전 정신이 눈에 들어오는 듯 했다.
다시한번 나를 돌아보게 만든 박경원이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