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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보다

삼국지[정사]의 개관


1. 배경



삼국지》(三國志)는 후한이 몰락하는 2세기 말부터 위, 촉, 오가 세워져 서로 다투다가 서진이 중국을 통일하는 3세기 후반가지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다. 황건적의 난을 시작으로 한의 천하가 무너지고 대륙의 군웅들이 지모와 무용을 다해 싸우던 시기로 조조, 유비, 손권이 천하를 삼분하였던 전한의 시기였다.
그 후에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에 이르러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다.

중국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중에 최고의 사서를 24사서(혹자는 25사서)라고 부르는데 이 중에서도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쓴 중국 삼국시대의 정사(正史)를 최고로 본다.
 
[후한의 운세가 기울기 시작하던 189년부터 진나라사마염(司馬炎)이 천하를 통일하는 280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리며 이십사사(二十四史) 중의 하나이다.]- 위키백과

2. 저자 진수

말그대로 진수가 쓴 정사를 바탕으로 한다. 우리나라의 사관과 유사한 직책을 가졌던 진수는 많은 역사서를 탐독하였지만 삼국지를 저작하면서는 그다지 많은 사서를 참고하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주로 참고했던 사료는 위서(왕침), 오서(위소), 위략(어환) 등이 있다.

우선 역사서인 만큼 이 사서를 기록(역사서는 기록이라는 의미를 가진다.)했던 진수에 대해서 알아본다.

 
진수(陳壽, Chén Shòu, 233년~297년)는 《삼국지》의 저자이자 중국 서진의 역사가이다. 는 승조(承祚)이며 파서(巴西)군 안한(安漢)현 사람. 그의 아버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마속(馬謖)의 참군을 지냈고 제갈량(諸葛亮)이 마속을 벨 때 머리를 깎이는 곤형을 받았다고 전한다. 일설에는 진수의 아버지가 촉의 장수 진식(陳式)이라고도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중국이 셋으로 분열된 삼국 시대에 태어난 그는 일찍이 촉한의 관리를 지냈고, 초주(譙周)의 문하에 있었다. 진수가 출사한 후, 촉나라에서 관각영사(觀閣令史)라는 벼슬을 지냈지만, 환관 황호(黃皓)에게 핍박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었다. 그가 31살이 되었을 때 촉한위나라에게 망했다. 진나라사마염(司馬炎)이 천하를 통일하고난 이후, 진수의 재능을 알아챈 사공 장화(張華)의 추천을 받아 진나라의 관리가 되었다. 좌저작랑(佐著作郞)·양평령(陽平令)을 역임했고, 저작랑·파서군중정(巴西郡中正)으로 전임했다.

진수는 삼국 시대의 저작들을 모아 《삼국지》를 편찬했다. 그는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은 진나라의 신하였기에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국지를 기술했다. 위나라와 오나라와는 달리 촉나라에는 엄밀한 의미의 사관은 없었지만, 진수는 촉나라의 관리였기 때문에 촉나라 기술의 부족함을 덜 수 있었다.

진나라의 장화는 진수의 뛰어난 안목과 탁월한 재능을 칭찬하고 황제에게 추천하려 했다. 그러나 장화의 정적이었던 순욱(荀勗)의 훼방으로 진수는 장광 태수로 전임됐다. 이후 진나라의 황제는 진수의 재능을 인정하고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에 임명했다. 이후 모친이 별세하자 진수는 관직을 버렸다. 낙양에 시신을 묻으라는 모친의 유언을 따랐으나, 고향에 묻어야 한다는 예를 어겼다는 이유로 향당의 비난을 받았다.

진수는 삼국지 외에도 《고국지(古國志)》50편, 《익도기구전(益都耆舊傳)》, 《관사론(官司論)》, 《석위(釋위)》, 《광국론(廣國論)》, 《촉상제갈량집(蜀相諸葛亮集)》을 편찬해 중국 사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진서(晉書)》〈진수전〉에서 진수를 평하길,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을 이어 이전의 전(典)을 이을 자는 오직 진수 뿐이라고 호평했다.



진수는 탁월한 저술가임은 확실한 것 같다. 촉나라에서 출사하여 진나라의 관리를 지냈던 그가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통일 왕조를 이룬 위나라를 중심으로 사서를 저작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으나, 후대에 평하길 삼국의 의미(짧은 기간이지만 엄연히 삼국이라고 불리우는 3개의 왕조)를 위나라만을 왕조로 기록하고 오와 촉한은 그 아래로 본것이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삼국지(진수)를 정사로 보는 견해는 학자들 간의 이견이 있다고 하나 개인적인 견해로는 남북조시대 송의 사서가 배송지에 의해 정립되었기에 그 원전인 진수의 삼국지가 정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삼국지는 총 65권으로 구성되었으며, 위서 30권(본기4권, 열전 26권), 촉서 15권, 오서 20권으로 구성되어있다. 원본은 위지, 촉지, 오지로 되어있었지만 이 역시 송대에 이르러 위서, 촉서, 오서라는 이름으로 정착된다.

사서로서의 면모는  '사기(史記)', '한서(漢書)'의 체계를 따라 인물전기 위주로 짜여 졌으나 앞의 두 책과는 달리 연표를 담은 표(表)나 당시의 경제·문화를 기록한 지(志 혹은 書)가 없다.

3. 배송지주 삼국지

삼국지는 정사인 진수의 삼국지에 주해를 달아 해석한 삼국지 배송지주가 있다. 앞에서 말한 남북조의 송나라 황제 문제가 사관인 배송지에게 진수의 삼국지에 주를 달것을 명하였고, 배송지는 주해를 넘어 약200여권의 사료를 인용하여 보충 및 고증을 하고, 오류와 모순을 지적하고 시정하였다.
더불어 자신이 인용한 자료의 문제점과 진수의 인물평과 자신의 평가를 첨부하기도 하였다. 이 부분이 진수의 삼국지와 다른 것으로 사료적 가치를 가진다 하겠다.
배송지주 삼국지의 글자수는 원문 약36만 9천자, 주해 약32만 2천자로 되어있으며, 방대한 자료의 인용으로 인하여 진수의 문장에 비해 읽기가 수월하고 재미있다는 평으로 인하여 [삼국지연의]를 비롯한 많은 삼국지관련 책자와 문학에 영향을 주게 된다.

배송지에 대해서도 알아보자(위키백과-배송지)
 

배송지(裴松之, 372년 ~ 451년)는 동진(東晉) 말 ~ (宋) 초의 정치가로, 자는 세기(世期)이며 사례(司隷)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 사람이다.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며, (魏)의 정치가 배잠(裴潛)의 아우 배휘(裴徽)의 6세손이다. 아들 배인(裴駰)은 《사기집해(史記集解)》를 저술하였으며, 증손은 배자야(裴子野)이다.

8살에 《논어(論語)》와《모시(毛詩)》에 통달하였으며, 몸가짐은 늘 검소했다.
태원(太元) 16년(391년)에 전중장군(殿中將軍)이 되었고, 동진에서 여러 관직을 거쳤다. 의희(義熙) 원년(405년)경에는 상서사부랑(尙書祠部郞)을 지냈으며, 선조의 비석을 함부로 세우는 것을 금할 것을 상주하였다.
의희 12년(416년), 훗날 송을 건국한 유유(劉裕)의 북벌에 사주주부(司州主簿)로서 종군하였다. 이후 태자세마(太子洗馬) · 국자박사(國子博士) 등을 역임하였다.
송이 건국된 후, 공적을 인정받아 원가(元嘉) 3년(426년) 중서시랑(中書侍郞) · 서향후(西鄕侯)에 봉해졌다. 이후 사례 · 기주(冀州)의 대중정(大中正)으로 전임하였고, 원가 6년(429년)에는 문제(文帝)의 명으로 《삼국지》에 주석을 달았다(배송지주, 혹은 배주). 또한 배송지는 《진기(晉記)》를 저술하였으나, 이후 소실되었다.
이후에도 대중정 및 영가군(永嘉郡) 등의 지방의 태수를 역임하였고, 마지막으로 국자박사 · 태중대부(太中大夫)를 지냈다.




특이한 점으로는 진수의 삼국지에서 위서의 마지막 30권인 [위서 동이전]에 오환, 선비, 동이전이 실려있으며, 그 순서는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 예, 한, 왜인 등의 동양민족 고대사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있다.

4. 삼국지 목록

위서(魏書) 1~30  촉서(蜀書) 31~45  오서(吳書) 46~65
     

[일부참조] http://ko.wikipedia.org/wiki/%EC%82%BC%EA%B5%AD%EC%A7%80 위키백과 - 삼국지